독후감 계축일기 독서감상문 ★ 계축일기 줄거리 ★ 계축일기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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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궁중문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계축일기”는 광해군이 어린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둔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할 때까지의 과정을 인목대비 측 시각으로 기록된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반정의 주요명분은 1.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고 2.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저질렀고 3. 친형인 임해군을 죽였고 4. 선왕의 애첩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명분삼아 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반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시대는 오히려 역사의 퇴보를 자초하였다. 인조는 반정의 일등공신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조선시대 왕 중 3번이나 파천하는 굴욕과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에 정묘, 병자호란을 불러와 조선인 약 45만명이 청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장자인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친손자 두 명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죽게 하고 며느리 강빈을 간통죄로 사사 하였다. 이처럼 무능하고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될 인물이 주위의 서인, 노론의 힘으로 왕이 되어 민생을 더욱더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계축일기는 일방적으로 광해군을 폭군으로 묘사하고 인륜을 저버린 왕으로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조선시대의 왕의 이미지를 알고 있다. 역사를 통해 배워가고 영상매체를 통해 어느 때부터인가 왕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광해군의 이미지는 어떠할까? 왕에 자리에서 내쳐진 무능력한 폭군의 이미지일까? 아니면 비운에 왕일까? 역사적으로 군의 호칭을 가지고 있는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뿐이다. 연산군은 어릴 적 똑똑했지만 어미의 일로 일해 미쳐버린 왕, 광해군은, 또렷한 이미지가 없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그렇다고 모르지도 않는 왕이기 때문이다.
계축일기는 인목대비의 시각이 방영되어있다. 광해군은 형제를 죽였으며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둬두는 폐악을 저질렀다. 이러한 점을 보면 광해군은 폭군임이 맞다. 그러나 광해군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왕들 중에 적통을 가진 왕이 얼마나 있으며, 왕위 쟁탈전 없이 왕의 자리에 않은 왕은 몇이나 될까? 세계적인 정세에서도 형제들과의 쟁탈전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형제뿐만 아니라 왕에 자리에 위협적인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광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하들과 인목대비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들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국내 정세를 불안하기 시작하였고 선조와 서인, 남인들은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만 남아 백성들과 같이 싸워나갔으며 그 이후에는 국내외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라를 버리고 떠난 왕과 신하는 어떻게 되었을까? 백성들의 노여움과 괄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왕이 되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인정받는 왕이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서인, 남인의 정치적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대동법의 실행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로 왕과의 대립을 시작 할 수 밖에 없었다.
계축일기를 보면 후궁에 빠져 정치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성정이 포악하다고 적혀있는데, 이런 역사적 사료들로 비추어 볼 때, 계축일기에서는 광해군을 부도덕한 왕으로 묘사하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왕권이 약화 되었으며 위협받을 위험이 컸다. 또한 국내 불안정한 정세와 식량난으로 민란이 일어났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인목대비와 신하들을 반대하였고, 이후 이들은 영창대군을 통해 정치적 변혁을 꾀하려 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광해군은 이들을 제거 할 수 밖에 없었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둘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왕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지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제거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 영창 대군의 죽음, 폐궁, 계축일기 속의 왕 또한 광해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차이로 인해 우리들은 광해군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버렸다. 또한 조선 중기 무렵 유교적인 사념이 꽃을 피우던 시기, 그들의 입장에서는 부도덕한 왕이며 중국과의 관계 또한 군신의 예의 하나 인데, 유교적 이념과 반대되는 정치를 하였다고 보여졌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른 왕과 신하, 이들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가 쇠약해지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시기에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치지만 서인, 남인들은 유교적 사상으로 인해 반발을 하였다. 이들이 볼 때 광해군은 정치적 책략가가 아닌 유교사상에 어긋난 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광해군을 왕으로 모실 수 없었을 것이다. 계축일기를 보면 서인과 남인은 유교사상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청렴한 선비로 표현되었으며, 광해군과 북인은 야만인처럼 표현되어있다.
계축일기의 내용은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진실 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폄하하려는 것이 보인다. 사실이기는 하나 거짓처럼, 소설처럼 느끼진 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속의 인물 광해군은 세계정세의 흐름을 읽었으며, 백성을 위하였고 개혁을 추구했던 왕, 그러나 왕실 속에서는 그는 폭정을 일삼고 정치를 문란하게 만들어버린 왕, 어떤 왕이 광해군일까? 역사를 배울 때, 광해군은 제위기간이 짧았지만 많은 것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그를 알아가기에는 제위기간이 짧아,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계축일기를 통해 그가 어떠한 왕인지 혼돈 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다. 역사는 사실적,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사를 편찬할 때는 승자를 위한 역사서가 된다. 계축일기 또한 그것과 같다. 유교적 사상을 앞세워 인조반정을 성공 하였고, 광해군은 물러나게 된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였지만 만약 실패하였으면 이는 반역이다. 성공하였기에 계축일기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실패하였다면 이는 피 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여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공하였고 계축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각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계축일기이다.
계축일기는 광해군의 연결고리이다. 이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치적 책략가에서 폭정의 인물이 되어버린 광해군, 그러나 그 또한 광해군이다. 우리는 광해군을 왈패마냥 폭정 군의 인물로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그를 봐라 봐야 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지만 인조반정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어쩌면 비운의 왕이었다. 왕재를 보유한 그가 조선후기를 좀 더 강력하게 이끌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또한 참혹한 양대 호란도 없었을 일이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어리석은 결정으로 국가대사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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