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아름다움, 빈 서판을 채워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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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빈 서판을 채워나가다
‘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의 주체가 불분명하거나, 불특정다수를 뜻한다면 논의는 많이 달라진다. 그러나 ‘나’라고 한정되었기에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을 전개할 수 있다. 이것이 느슨한 객관성, 달리 표현하자면 그 어느 ‘것’에 대한 탐구에서도 요구되는 엄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나 자신을 완벽히 객체화하거나, 객체로서의 나 자신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나 자신에게 1차적으로 인식되어지는 나 자신을 인과관계의 결과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시공관과 유리된 자체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인다면 스쳐 지나가는 스냅샷보다도 얕은 논의일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논하려면 현재 나에게 무엇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가를 찾기 전에 이 질문의 가장 기저에 깔린 개념, 즉 ‘사실과 가치’부터 찾아야 한다. ‘무엇’은 사실이며, ‘아름답다’는 내가 그 ‘무엇’에 부여한, 혹은 부과된 가치이다. 여기서 간단해 보이는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는가 가치를 먼저 인식하는가? 만일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그 다음에 그에 부과된 가치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순간이나마 ‘객관’을 먼저 안 후 그 알아낸 객관에 주관을 덧씌운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객관을 알 수 없다는 건 -모든 인식은 주관이다- 자명하기에 사실-가치의 관계를 좀 더 분석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이미 나에게 어느 식으로든 인식된 (혹은 생성된) 가치관을 통해 사실을 인식한다고 가정해 보자. 엄밀히 말하자면 가치관-(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가치관에 의해 가치가 부여된 사실 순이지만 간단히 가치관(가치)-사실이라고 축약하여 생각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그 가치관은 어디에서 왔는가? 가치가 항상 사실에 앞선다면, 사실로 인하여 가치관이 바뀔 수는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다양한 반례들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사실들을 인식할 때 가치관이 요동치며 따라서 가치가 모든 사실(의 인식)에 앞선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이 문제는 닭과 달걀의 문제에 더 가까워졌다. 닭이 깨어나는 달걀이 먼저인가? 달걀을 낳는 닭이 먼저인가? 이는 진화론이 급부상하며 ‘최초의 닭이 깨어난 달걀’이 먼저라는 정답이 나오면서 해결되었다. 사실과 가치의 선후관계도 마찬가지로 접근해 보자. ‘나 자신 앞에 놓여진 최초의 사실’과 ‘나 자신이 가진 최초의 가치관’은 어느것이 먼저인가?
논의를 더 전개시키자면 중요한 전제 하나를 도입해야 한다. 인간은 빈 서판(tabula rasa)인가, 최소한의 가치관이 미리 채워진 서판인가? 만일 가치관을 생리적인 영역 - 뜨거운 것은 싫다, 추운 것은 싫다, 아픈 것은 싫다 - 까지 넓힌다면 당연히 답은 후자이나, 구하고자 하는 영역과는 많이 벗어나 있기에 가치관을 ‘인식에 있어서의 가치관’, 즉 사실을 인식함에 있어 영향을 끼치는 가치관으로 정의하겠다. (단, 인간의 시각, 촉각, 청각과 같은 생리적인 요소가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주관은 맞으나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겠다. 굳이 정의하자면 본능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것이 일부분나마 DNA 속에 각인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힘들다. 만일 각인되어 있다면 당연히 최초의 가치관이 최초의 사실(의 인식)에 앞서며, 가치관-사실-(사실에 영향을 받은) 가치관-사실 순으로 계속된다. 이 경우 알아내야 하는 것은 ‘과연 그 최초의 가치는 무엇인가’이다.
여기에서 조금 위험한 의문을 던져보자. 그 최초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만일 최초의 가치 없이는 현재 나의 인식이 존재할 수 없다면, 당연히 최초의 가치는 존재하여야 한다. 하지만 최초의 가치 없이도 이는 가능하기에-이는 조금 뒤에 보일 것이다- 그 논증은 버려야 한다. 이제 유일한 가능성인 ‘가치관이 DNA에 각인되어 있다’를 살펴보자. 이는 생리적인 요소, 혹은 한계와는 유리된 순수한 가치여야 하기에 생리적인 본능과는 달라야 한다. 최대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태아가 생성된 감각기관으로 자궁 속에서 나름의 인식을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본능과 유리된 가치관이 있다면 태아는 이때부터 가치관의 영향을 받은 인식을 한다. 이 이전에 가능한 가치관이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모두 자궁 속의 태아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했기에 여기서 감히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겠다. 물론 이 논증은 그다지 엄밀하지 않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기에 ‘사실에 완벽히 앞서는 최초의 가치관은 없다’는 것을 참인 명제로 취급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를 강한 전제로서 활용할 것이나 확정된 참으로는 취급하지 않겠다.
최초의 가치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최초의 사실은 존재할까? 모든 가치관에 앞서는, 최초의 사실이? 그렇다면 이는 인간이 객관에 가장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사실이며, 오로지 생리적인 한계에만 영향을 받았을 뿐인 날것 그대로의 사실이다. 이에 대해선 ‘있을 가능성이 높으나 무의미하다’가 가장 정확한 답일 것이다. 태아기 때의 인식은 뇌의 성숙도나 주어지는 자극을 생각해 볼 때 현재 나에게 미치는 인과적 영향은 미미하여 그때 내가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지금 현재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있느냐 / 없느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시공간 안에서 현재 나의 인식까지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가치에 앞서는 사실이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그런 사실이 있다면 순수한 사실만으로 생성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외부 자극이어야 하며, 가치 없이 순수한 사물에 대한 인식에선 사물에 대한 인식만 나오기에 누군가가 가치를 주입하여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이것을 ‘첫번째 사실’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당연히 ‘이’ 첫 번째 사실을 주입받을 시기엔 이미 기본적인 인식적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을 시기이기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첫번째 가치’와 ‘첫번째 사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과 가치는 유리되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정확히 같은 시공간에서’ 인식된다. 닭과 달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엉켜있는 플라나리아에 가깝다. 물론 현실의 플라나리아는 독자적인 개체지만, 서로 엉켜서, 심지어 시시각각 상호작용을 하기에 전혀 뗄 수가 없는 플라나리아를 자르는 것을 상상해 보자. 이때 잘라진 두 개의 덩이는 각각 두 개의 개체씩 엉켜 있는 플라나리아로 자라난다. 이 중 이 엉켜있는 개체 중 무엇이 먼저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분명 둘 중 하나는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했겠지만, 언제부터, 최초의 형상이 무엇이었는지는 현재 엉켜있는 플라나리아에 인과적으로 영향은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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