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한국영화사 개척기 한국영화사 암흑기 한국영화 모색기 한국영화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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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한국영화사’
<한국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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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한일합방 이후, 한국은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들에게 차례로 문호를 개방했다.처음 활동사진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1897년에서 1900년 무렵은 그야말로 이름만 주권 국가이지 외인들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거나 침탈당하던 때였다. 특히 일본은 러일 전쟁이 일어난 후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후, 한국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잇는 협약을 계속 체결하여 일본의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한국이 이처럼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만 것은 수구, 개화파의 대립과 이로 인한 정국 불안이 가장 큰 내적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한국이 어느 외국세력으로부터 자립하려고 할 때마다 또 다른 외세에 더욱 크게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에 주재한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무능력과 부패에 실망을 느끼고 한국을 뒤로 제쳐놓은 채 한국의 운명을 일본과 협의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국내외 정세는 한일간 강제합병이라는 쓰라린 역사의 한 순간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이처럼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사진 관객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활동사진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접하는 몇 안되는 통로 중 하나였는데,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이후 국내에 근대적 교육 기관으로서 사립학교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들, 특히 이미 학령을 넘어섰거나 여타 이유들로 인해서 교육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이 근대화된 신문물은 접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만나게 된 새롭고 신기한 기계 출현, 그리고 그것이 뿜어내는 빛줄기가 스크린 위에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풍물을 소개하는 모양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부터 품어오던 개화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활동사진(영화)은 개항의 물결이 파도처럼 들어오는 관문인 동시에 폐쇄된 민족 심리의 거대한 해방, 그 충족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1)한국영화의 흐름
<초창기>
이러한 한국에 처음 영화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1903년, 물론 이전에도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전해지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황성신문에 실린 영화광고로 미루어 1903년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 때 상영된 영화는 활동사진 수준의 작품이었으며, 1910년을 지나면서 <쿼바디스>, <부활>등 외화들이 식민지 시대 한국 대중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 1세대인 한국영화 개척자들은 대부분 연극에 몰두해 있었는데, 특히 신극 좌를 운영하던 김도산은 연극계의 불황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연쇄극 <키노드라마>를 꿈꾸게 된다. 김도산은 이때 한국 땅에 첫선을 보이던 일본의 연쇄극을 보고 자극을 받아 , 민족 자본가인 박승필(그 당시 단성사 주인)과 힘을 모아 1919년, 한국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의리적 투구>를 한국 최초의 영화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연쇄극이라는 성격이 영어 미학적으로 연극예술의 확대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시기의 불행한 일은 우리의 영화가 일본의 영향 아래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연쇄극이란 것도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연극 중간에 잠깐 영화필름으로 찍은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미흡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아무런 창조성 없이 모방하다보니 자연히 일본의 신파, 즉 현실과는 무관한 황당한 주제, 눈물 짜내기, 관객들의 저급한 취향에만 영합하는 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연쇄극에 종사한 조선인들도 비판의식을 가진, 당시의 조선 실정에 대한 자각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단지 줄넘기하는 광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 위해 흥행계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조선영화는 처음부터 일본의 신파극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출발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극이 촬영을 제외한 모든 작업이 순수한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완전히 한국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완수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 20년으로 들어서면서 연극 부속물의 역할에 머물던 영화가 드디어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제 한국 무성영화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22년 김도산은 최초로 완전한 극영화 <국경>을 시도하였고 (그러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바람에 완성은 하지 못했다.)23년 윤백남은 <월하의 맹세>를 발표하였다. 한국영화 제1호로 뽑히는 이 작품은 저축 장려를 주제로 한 계몽극 이었는데 주연을 맡은 이월하는 본격적으로 스타의 자리에 오른 여배우가 되었다. 24년에는 이필우에 의해 완벽하게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조선여자>, <정구대회>가 만들어 졌으며, 25년부터는 이경손이 <심청전>, <개척자>, 이필우가 만화를 영상화한 희극영화 <멍텅구리>를 발표하는 등 한국 무성영화의 전성기로 접어들게 된다 참고적으로 1924년 당시 유일한 조선인 극장주였던 단성사의 박승필은 한국 사람들만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취지 아래 단성사 촬영부를 신설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감독(박정현), 각본(김영환), 촬영(이필우) 등 스탭, 캐스트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최초의 영화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이었고 순수한 우리 영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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