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문] 사도 - 영조와 사도세자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est1est2est3est4est5 1(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영화 ‘사도’
-영조와 사도세자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는 조선 최장수 왕으로서 83세까지 살았다. 31세에 즉위해 무려 52년 동안 집권했다. 조선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6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영조의 장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으로서 영조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영조는 1694년에 숙종의 차남으로 태어나 6세(1699년)에 연잉군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숙빈 최씨를 25세(1718년)에 여의었고 28세(1721년)에 이복형 경종의 후계자로 왕세제가 되었다. 왕세제가 되기 전 10여 년동안 궁궐 밖에서 어머니와 함께 궐 밖에서 살면서 보통의 아이들처럼 일반 백성들과 뛰어 놀며 지냈다. 그는 숙종의 아들이긴 하나 무수리 최씨 소생이었다. 무수리는 궁중에서 청소, 빨래 등의 허드렛일을 담당했던 여자 종을 일컫는데 즉 천민이었다.
영조는 집권할 때 세 가지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천민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영조는 후궁도 심지어 궁녀도 아닌, 궁녀의 옷을 빨아주고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무수리, 즉 천민의 소생이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천민 출신의 왕이 등장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고, 어렸을 때는 왕이 될 줄 모르고 서민들과 뛰어놀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자신의 배다른 형인 경종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굴레를 뒤집어쓴 것이다. 경종이 몸이 아프니 영조가 형님의 쾌차를 바라며 게장을 올리고 이어서 생감도 올린다. 그런데 이 게장이 속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다소 비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경종이 비린 게장을 먹고 복통을 앓고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속이 아주 불편한 상태에서 게장과는 상극인 감을 먹었으니 경종의 속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다. 경종이 며칠 동안 기력을 되찾지 못하자 영조가 이번에는 인삼차를 올릴 것을 주장해 경종은 인삼차를 마셨다. 하지만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인삼차를 마신 다음 날 경종은 승하했다. 영조는 형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굴레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선왕을 독살했다는 것은 역모를 통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인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영조 연간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경종 독살설에 의구심을 가진 강경파 소론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즉위 초반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 지방을 뒤흔든 강력한 사건이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면서도 강경파 소론 세력은 멀리할 정도였다. 세 번째 콤플렉스는 영조 자신이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천민의 아들이 왕이 된 것도 콤플렉스인데, 자신의 힘이 아닌 신하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입지가 약했을까?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오늘날 영조를 아들을 죽인 ‘비정한 군주’로 여기기보다 조선의 중흥을 이끈 군주로 손꼽는 것은 그가 이룬 여러 업적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공부에 더욱 몰두했다.
영조는 중전으로부터 후사를 얻지 못했다. 본처인 정성왕후가 죽은 후, 15세 소녀 정순왕후르 새 중전으로 맞이했지만 이사이에서도 후사가 없었다. 대신 여러 후궁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었다. 그 가운데 아들이 있었는데,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다. 그런데 이 효장세자는 어렸을 때 세상을 떴다. 그러다가 영조 나이 42세에 후궁인 영빈 이씨가 귀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이선, 사도이다. 오늘날에도 마흔에 자식을 낳았다면 늦둥이라며 굉장히 예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으니 마흔에 얻은 자식이라면 영조의 눈에 이선이 얼마나 예뻤을까? 영빈 이씨가 낳은 아들 이선은 생후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조선 최연소 세자였다. 게다가 이선은 천재성을 타고난 아이였다. 영특한 아들이었으니 영조가 이선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히 매우 컸다. 영조는 아들 이선을 통해 출신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했을 것이다. 이선은 어린 시절 열심히 공부하며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이선이 성장하면서 아버지와의 사이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조선은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하였는데 사도세자는 10세 때부터 공부를 멀리했다. 세자가 공부를 멀리하면 할수록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 역시 멀어져 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선은 15세부터 공부보다 무술을 가까이했다. 이선은 심지어 대리청정을 하는 기간에도 12가지 기예를 담은 무예서 편찬을 지시하기도 했다. 영조의 기대는 무너진다. 영화 속 영조(송강호 역)가 이선에게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니?”라고 꾸짖는 장면은 이런 답답함에서 나온다.
세자가 15세 때 아버지 영조는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다. 영조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세자는 14년 동안 대리청정을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부자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실록에 의하면, 대리청정 기간에 세자가 신하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면 아버지 영조는 따로 불러서 훈계를 했고, 반대로 신하들의 의견을 거부하면 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느냐며 꾸중했다고 한다.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늘 주시했다.세자의 대리청정에 대한 아버지 영조의 관심은 다소 지나쳤고 간섭도 많았었다. 이 때문에 세자는 영조가 진노하는 것을 늘 걱정했다.
아버지 영조의 지독한 관심과 꾸중 속에서 결국 세자 이선은 정신병을 얻고 미쳐버린다. 바로 의대증이라는 병에 걸리는데, 의대증은 옷 입는 것과 벗는 것을 잘 못하는 병을 말한다. 세자는 옷을 입는 순간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 했다. 사도세자가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건 세자가 14세 때인 영조 25년경으로 추측된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영조와 점차 관계가 껄끄러워지던 시기다. 교수팀은 실제 사도세자가 13~14세(1748~1749년)부터 우울증상, 불안증상과 함께 환시 같은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된 것으로 파악했다. 17~19세(1752~1754년) 때는 쉽게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계증도 간헐적으로 보였다. 실제 영조24년(1749년) 한중록에는 "처음에는 서운하고 섬뜩하신 것이 점점 성화가 되어서 우실 적도 계셨다." "늦은 밤에 정신이 어둑하시어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 하시고 무서워하셨다" 등의 기록이 있다. 20~21세(1755~1756년)에는 자살 소동도 있었다. 우울증상과 더불어 흥미저하, 의욕저하를 보이며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던 시기다. 당시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혼이 난 뒤 아무래도 못 살겠다며 저승전 앞뜰에 있는 우물로 뛰어들려 했다. 이 시기 사도세자는 우울증과 함께 폭력적, 충동적인 경향도 두드러졌다. 특히 22세(1757년) 땐 그 공격성이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하루는 당번 내관을 죽여선 머리를 잘라 들고 와 부인 홍 씨를 질겁하게 한 적도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달리 성격이 온순하고 수용적인 편 이었지만 이같은 행동은 평소 성격에 기인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병적 상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이후에도 사망 전까지 조증과 우울증 증상을 번갈아 보였다. 사도세자의 양극성 장애는 가족력도 한몫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양극성 장애는 가족력이 있을 때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도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숙종 또한 다소 감정기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는 영조가 세자를 불러서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고 묻자 세자는 ‘울화증이 치밀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왜 울화증이 치미는 것이냐?’ ‘아바마마께서 소자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울화증이 생겨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이지 않고서는 속이 풀리지 않습니다’ 아들의 대답을 들은 영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의 손을 잡고서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마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고, 이 대화가 있고 나서 몇 년 뒤에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이 아니었다. 임금과 세자였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서 원한 것은 세자로써의 흠 없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충족되지 못한 완벽함의 추구였다. 영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세자가 완벽하길 바랬다. 영조에게 세자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영조가 세자를 자신과 동일시한 나머지 세자에게 더욱더 엄격하게 대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세자의 모습을 보며 그를 미워했다. 영조 자신 스스로의 불안전한 모습에 대한 것이 자식인 세자의 모습에 투영된 것 같다. 영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통해서 세자를 바라봤다. 지독한 콤플렉스를 가진 영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리고 세자도 사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자는 영조에게 임금이 아닌 아버지를 원했다. 영화 속에서 사도세자(유아인 역)는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와의 관계때문에 미쳐버리게 되었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면 그는 불안해 하며 우울감과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그의 증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들며 사도세자의 양극성 장애 가능성애 대해 언급하고 있다. 양극성 장애란 조증 혹은 경조증과 우울증이 동반된 기분장애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조증이란 의기양양한 기분을 특징으로 하며, 행복감에 차 있고 평소와 달리 기분이 좋으며, 즐겁고, 고양된 상태를 말한다
자료평가
  • 자료평가0자료평가0자료평가0자료평가0자료평가0
  • 괜찮게 잘 쓴 글이였다
  • 71641***
    (2021.12.03 18:41:53)
회원 추천자료
  •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 [독서감상문]
  • 영화(람보, 록키 등)를 수입해 흥행하고,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개막하였다. 또한 ‘뽕’ 등 에로 영화를 대거 제작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마지막(365)은 ‘조선물산공진회’이다. 일제가 1915년 2개월 동안 경복궁에서 실시했던 대규모 박람회이다. 조선합병 5주년을 기념하고자 경복궁 궁궐 19만 평 중 7만 평이 전시장으로 활용됐다. 광화문, 경회루 등에 수백 개의 전구를 달아서 밤을 화려하게 밝혔다. 이를 통해 근대화된 일본 제국의 위

  • 문화로 보는 고소설
  • 영조대 ‘명기집략사건’의 정치적 성격》,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0.전관수, 《한시어사전》, 국학자료원, 2007.진동혁, 《(역주) 시조총람, 2 : 이세보 기타 시조》, 하우, 2000.최명자, , 아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최명자, , 《국제학술대회》, 중한인문과학연구회, 2003. 함규진, ‘초한지의 인물들(1)’,《테마인물열전》, 네이버캐스트, 2012.고소설 원문 자료, 《한국

  • 8그램의 행복 [독서감상문]
  • 영화 〈일 포스티노〉로 잘 알려진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나이답지 않게 장난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녀 배우 헤디 라머는 촬영 중간에도 틈만 나면 대기용 트레일러에 들어가서 ‘발명’에 몰두하다가 훗날 와이파이에 응용되는 무선통신체계를 개발했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소확행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그런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베토벤의 창작은 커피에서 시

  • [사학] 친일파 99인 자료
  • 감상문 강요,영화제작) 친일정변 이용 1>임오군란 , 별기군의 신식군과 구식군의 차별대우, 제물포 조약으로 교두보2>갑신정변 , 자주적 개혁의지를 친일로 이용3>을미사변 , 일제와 친일세력의 노골적 결탁 불평분자, 불우한 정객 (배정자, 민원식) 대륙낭인, 일진회의 매국활동에 참여 (흑룡회) 매수, 협박 병합후 작위수여, 상치은사금, 구휼금지급, 수산사업 재개2 > 식민이론과 정치모략서향일파의 정한론이 정권안정차원에서 거세된후

  • 9급 국어 정리 레포트
  • 사도 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기록한 글 - 자전적 회고록b) 인현왕후전c) 계축일기(일명 서궁록) : 인목 대비의 성궁 유폐 사건을 기록한 글 ☆ 3대 여류 수필 : 동명일기, 조침문, 규중칠우쟁론기(4) 제문 형식 : 조침문(유씨 부인)(5) 기타a) 윤씨행장(김만중, 어머니 살아 생전의 이야기를 적은 것) : 추도문 형식(전기)b) 규중칠우쟁론기 : 의인체c) 요로원야화기(박두세) : 선비 사회의 병폐를 대화체로 파헤친 풍자 수필(나 : 자기자신)d) 어우야담(유몽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