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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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파리코뮌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목 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식량폭동’ 또는 경제적 불만의 해결 추구
2. 혁명적 선동과 내부 적에 대한 감시
3. 군사적 역할의 추구 및 행사
4. 시민권의 추구 및 행사
5. 대표적인 인물
Ⅲ. 맺음말
◆ 참고문헌
Ⅰ. 머리말
파리 시의회는 나폴레옹 3세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에서 오는 좌절감과 독일의 파리 포위전으로 인한 탈진감에서 ‘파리코뮌(Paris Commune)’을 구성하였다. 코뮌이 내세운 강령은 민주주의와 연방주의였다. 그 중 코뮌의 직접민주주의 핵심을 이룬 것은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의 참여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된다. 여성들은 식량폭동이라는 전통적인 저항형태를 통한 경제적 불만의 표출과 혁명전쟁에 대한 남성들의 참여 독려 및 국내 반혁명분자의 색출작업, 공화국 시민으로서 남성들과 동등한 시민권의 추구, 그리고 이런 시민권 추구와 연관된 적극적인 군사적 역할의 시도로 구분된다. 그 이후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들에서 여성의 활동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여진 이런 네 가지 범주의 여성 역할 내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1871년 파리코뮌의 여성 활동 역시 이런 네 가지 범주에 입각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식량폭동’ 또는 경제적 불만의 해결 추구
여성들이 혁명이나 반란에 연루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량이나 경제적 빈곤 문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19세기 말까지도 여성들이 가정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고 특히 아이 양육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문제와 관련된 여성 행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식량폭동 식량폭동은 근대 초기 유럽 사회의 전통적 저항형태 중 하나이며, 기근 시기에 굶주린 민중이 식량마차를 습격하거나 식량 창고를 습격하여 곡물이나 생필품을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가격으로 팔아버린 것(taxation populaire)을 말한다.
이었다.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유로의 행진 역시 여성이 벌인 최초의 대표적 집단행동으로, 식량폭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및 도시화의 결과로 19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경제적 불만의 내용이 식량문제에서 집세나 실업 및 임금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파리코뮌에서 식량폭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1870년의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 과정에서 약 6개월 정도의 포위상태를 겪은 파리는 극심한 식량 부족 상태에 있었음에도 식량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화국의 방어’와 ‘결사항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파리 여성들은 식량부족 문제를 감수하였던 것이다. 당시 ‘여성동맹’은 코뮌에 의해 준공식기구로 인정받으며 코뮌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코뮌에 주로 일자리를 요구했고, 이런 요구는 ‘여성동맹’을 비롯한 여성 결사들에 의해 코뮌에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5월 중순부터는 ‘여성동맹’이 “여성 노동자를 위한 결집체의 형성과 연합” 및 “각 직종에 여성 노동자를 위한 생산 협동조합의 형성”을 코뮌으로부터 전적으로 위임받고 여성 노동자들의 총회를 소집하였다. 결국 코뮌의 마지막 시기인 5월 말에는 ‘여성 노동자 생산 아소시아시옹(association) 연합의 일반 규약’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코뮌 시기 여성들의 주된 경제적 불만이었던 실업 문제는 코뮌의 공식적인 ‘노동의 재조직’ 정책과 연관되어 ‘사회적’ 해결이 추구되었던 것이다.
2. 혁명적 선동과 내부 적에 대한 감시
선동과 감시는 혁명에서 특히 강조되는 여성의 역할이었다. 대내외에서 동시에 적을 맞고 있는 코뮌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전 혁명에 비해 이 역할이 더 활발하였다. 여성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도망치는 남성들을 색출하고 위협하고 비난하였다. 1871년 5월 6일 한 여성 클럽에서 어떤 여성은 “남자들은 겁쟁이”라고 외치면서 “그들의 베르사유의 겁쟁이 떼에게 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내버려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도시를 방어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5월 중순 생 텔루아 교회에서 열린 클럽 집회에서 발랑탱이란 여성은 모든 여성들이 자기 남편을 무기를 잡게 만들고 “만일 그들이 거부하면 그들을 쏴 죽여라”고 요구했다. 역시 5월 중순 나탈리 르멜은 “우리는 조국을 위해 죽어야 할 지고의 순간에 다가가고 있다. 더 이상 무기력함과 불확실함은 없다! 모두가 전투에 나서자! 모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자!”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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