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이원록(陸史 李源錄) 민족시인, 저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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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육사 이원록
(陸史 李源錄)
민족시인, 저항시인
Ⅰ. 이육사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1904년 04월 04일 - 1944년 01월 16일)
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와 김해 허씨(범산 허형의 따님)의 6형제 중 둘째로 출생한다. 그의 처음 이름(호적명)이 원록이었고, 뒤에 원삼으로 불렸으며, 활은 스스로 부른 이름이다. 자(字)는 태경, 육사는 호다. 그의 호 ‘육사’는 대구 형무소에 구속되었을 때 수인 번호 64(또는 264)를 취음, 표기한 것이라 한다. 어떤 때는 죽일륙(戮)자를 써서 육사(戮史)라고 희필 하였다.
육사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가 모두 강렬한 항일투쟁의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특히 친가로 보면 육사는 퇴계의 13대 손이며 형조참판을 역임한 바 있는 사은 이구운의 6대손으로 뿌리 깊은 유가의 전통아래에서 자랐다. 그는 5세 때부터 조부 치헌공(痴軒公)이중직에게 소학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 눈물을 흘리지 말 것을 교육받았는데 이때 만들어진 선비정신이 좌절의 고통 속에서도 패배주의와 지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육사는 용모도 청수(淸秀)하고 기상이 굳세며, 품성이 초강(楚剛)하며 예법에 어그러짐이 없어 여름에도 정장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7살이 되던 해(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식민 통치와 3.1운동의 좌절 속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거치면서 육사는 민족정신을 자각하고 항일정신을 형성하게 되었다. 13세에는 조부가 숙장(塾長)인 예안의 보문의숙에 백형 원기를 따라다니며 신학문으로 견문을 넓혔고 17세 때 숙제(叔弟) 원일과 대구로 나와 석재(石齋) 서병오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여 후일 상당한 진경을 보였다. 또 18세 때는 영천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혼인하고 영천 화북면 백학 학교에서 이명선, 백기만 등과 6개월간 공부하다가 대구 교남 학교로 옮겨 다녔다. 20세 때는 일본에 건너가 약 1년간 머무르면서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세(1925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한다. 극단적 투쟁방법의 일환으로 의열단에 가입한 것이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등에 연루되어 검속된 것,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노신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때 육사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엿볼 수 있으며 그의 사회주의적 지향성은 일제 강점기 시대상황에 따른 비판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는 것은 서른이 넘어서인 1930-1944년 이었는데 문학보다는 투쟁이 먼저였다. 이 시기는 일제의 민족 말살기로 우리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친일을 하거나 순수문학을 지향하지만, 육사는 남성주의적 대결정신과 강인한 대륙적 풍모를 보여주면서 현실을 강렬한 시어 속에 응축시킨다.
육사는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된 ‘말’로 데뷔하였고 1933년 <신조선>에는 <황혼>을 발표하였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와 시 <실제>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교목><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작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도 헌신, 전생애에 걸쳐 17회나 투옥되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36편의 시 외에도 1937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단편 소설 ‘문외한의 수첩’, ‘황엽전’ 등 2편, 평론 16편(문학 평론은 <노신 추도문> 등 5편, ‘계절의 오행’, ‘산사기’, ‘연인지’ 등 수필 기타 잡분 16편, 번역 2편 도합 72편의 작품을 썼으며 이 밖에도 최정희에게 보낸 엽서와 유묵 2점 ‘의의가패’, ‘청향가상’을 더해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보였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그해 4월 귀국하여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와 헌병대에게 6월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만다. 육사는 광복을 눈앞에 두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41세의 나이로 북경 감옥에서 생을 마친다. 유해는 고향 뒷산에 안장되었고 1964년 안동시에 시비가 세워졌다.
Ⅱ. 작품 경향
1. 시어
육사 시어의 특징은 ① 강렬성, ② 전통성(고전성), ③ 수식성, ④ 광활성, ⑤ 다양성(한자어서구식 외래어신어방언어미의 활용 기교) 등으로 요약된다.
육사의 상상력을 자극한 시어들로 빈도가 높은 명사(대상, 소재)는 꽃, 짐승, 새, 나무, 보석, 하늘, 땅, 바다, 고향, 죽음 등에 관계되는 것들이고, 그 중에 ‘황혼, 별, 박쥐, 꽃, 무지개, 청포도, 닭 울음소리’ 등의 명사와 부사 ‘차마’의 쓰임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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