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관찬기관의 변천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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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p o r t
근대 관찬기관의 변천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근대 관찬기관의 변천 -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 목 차 ≫
1. 일제강점 이전의 관찬기관
2.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사서편찬
3.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설치
4. 조선사편수회
가. 조선사편수회의 설치
나. 조선사편수회의 구성
다. 조선사편수회의 활동
라.『조선사』의 성격
5. 현대의 관찬기관
7 -
1. 일제강점 이전의 관찬기관
개항 이후에 역사서술이 거론되는 것은 1894년 6월의 갑오경장을 시작할 때이다. 군국기무처는 의정부에 編史局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래서 의정부에 ‘편사국’이라는 관청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드러난 활동이 없는 형식상의 기관이었던 것 같고, 실상 역사편찬은 學部 대한제국 때에 교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고종 32년(1895)에 학무아문을 고친 것이다.
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1895년 한성사범학교와 성균관 경학과와 4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학과정도표가 발표되었는데, 거기에 ‘本國史’ 과목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시급한 것은 ‘본국사’ 시간에 쓸 교과서의 편찬이었다. 그래서 1895년 학부에서는『조선역사』,『조선역대사략』,『조선약사』의 3서를 편찬하였다.
이 3서는 한국사가 종래의 한문이 아닌 국문(국한문 혼용)으로 서술되고, 연호 사용에서도 종래의 중국 연호가 아닌 조선건국기원(1392)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편년체 방식을 답습하였고 왕실 중심의 명분론 시각 등 중세적 잔영이 완연하기 때문에 근대사학의 저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조선약사』의 경우는 편년체를 떠나 왕조의 변천은 요점만 밝히고 각종 제도와 사회생활에 비중을 두고 서술했다. 서술방식만큼은 그때로서는 혁명적 변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1899년 학부 편집국에서『東國歷代史略』『大韓歷代史略』『東國歷史』등의 3서가 출간되었다. 앞의 두 책은 김택영이, 뒤의『동국역사』는 현채가 편찬하였다. 이 3서는 편년체를 답습했는데 내용은 한결 1895년의 3서에 비해 한결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우리민족에 의한 역사서술은 私撰으로 전환되어갔다. 관찬사서는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이후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2. 조선총독부 中樞院의 사서편찬
병탄 이후 일제의 韓國統治基調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화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 것이 한국사회에 대한 조사연구였다. 한국인의 정신생활, 민족심리, 역사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인을 일본인화시키기 위한 동화정책을 수립하고자 했다.
일제는 1911년 이후 총독부의 取調局과 그 뒤를 이은 參事官室 참사관실은 취조국의 업무를 계승하여 1912년 4월에 설치되었다. 이 곳에서는 전국에 산재한 金石文을 수집하여『朝鮮金石總覽』의 편찬을 시작하였고 圖書 및 邑誌의 수집, 活字版本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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