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드 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 잘못 그린 군복이 진짜 죄인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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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드 마네 : 막시밀리안의 처형, 1868
(Edouard Manet : The Execution of Maximilian)
잘못 그린 군복이 진짜 죄인을 폭로한다.
에두아드 마네(Edouard Manet)는 이 그림을 통해 정치적 범죄를 규탄하고, 프랑스 군중의 여론을 자극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국의 검열관은 그가 계획대로 그리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다. 당국의 관료들은 조심스럽게 이 작품을 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마네에게 이야기 했다. 이 일 때문에 그가 다른 훌륭한 그림조차도 1869년 공식 파리지앙 미술 전시회에 출품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네의 작품은 몇 년간 유럽 언론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던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준다. 정규 신문의 독자라면 누구나 한눈에 그 장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1867년 6월 19일 이른 아침 퀘레타로(Queretaro)의 멕시코인 마을 근처에서, 공화주의자들의 총살부대가 오스트리아인인 막시밀리안(Archduke Maximilian)과 그의 두 장성을 처형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막시밀리안은 3년 동안 멕시코의 황제로 그곳을 통치했었다. 소수였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대륙으로 초대된 막시밀리안은, 또한 자신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로부터도 이 불행한 모험에 참가하기를 권유받고 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그의 군대를 멕시코에서 철수시키자, 막시밀리안은 그의 적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퇴위를 강요받은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너는 검열관에 대한 그 공포와 분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1869년 마네가 그의 친구인 작가 에밀 졸레(Emile Zola)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다. 또 “예술가는 ‘프랑스인이 막시밀리안을 쏘았다!’는 그 잔인한 아이러니를 대담하게 주시 할 수 있다.”라는 말도 편지에 담겨 있다. 현재의 뉴스잡지에서 사진이 하고 있는 역할을, 그 당시에는 그림이 하고 있었는데, 마네도 정치적 스캔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실었다. 프랑스는 이런 종류의 그림에 있어 전통이 있었다. 1819년에 테오도르 게리컬트(Theodore Gericault)는 그의 Raft of the Medusa 작품에서 해군 관료의 범죄적인 무능력함을 공격하였고, Massacre at Chois(1824)와 Eugene Delacroix에서는 그리스의 해방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유럽의 해방투쟁에 대해서 조롱했다. 이 모든 작품은 모두 전시되었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마네는 그의 Execution 작품이 비슷하게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1867년 7월 초, 파리에서 막시밀리안 처형사건이 처음으로 보도된 직후에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일 년 반 동안 그는 유화로 만든 작은 구상작품 한 점과, lithogragh(검열관이 팔지 못하도록 금지한 그림) 한 점과, 세 점의 대규모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 중 어떤 것도 작가가 살아있는 동안 프랑스에서 전시되지 못하였다. 1870년 두 번째 황제의 서거는 어떠한 개선도 가져오지 않았고, 부끄러운 멕시코 사건을 상기시켜주는 그 그림들을 보기를 원하는 프랑스 공화당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캔버스들은 결과적으로 마네의 작업실에 구석진 자리에 박혀 있었다. 1883년 위대한 예술가였던 마네가 죽은 뒤에야 그 작품들은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졌고, 그 파편들이 뒤늦게 런던(London)으로 가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유화 스케치는 코펜하겐(Copenhagen)으로 보내졌고, 큰 규모의 작품들 가운데 첫 번째 버전은 보스톤(Boston)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1868년에 완성했던 252×305cm 크기의 마지막 버전은, 처형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날에 옮겨지게 되었다. 1909년에 멘하임(Mannheim)의 독일마을에 거주하는 시민이 이 마지막 작품을 구매하여 쿤스트할레(Kunsthalle)에 기증했다. 그 당시의 독일 라이히(Reich)에는 프랑스를 조롱할 거리가 있으면 어떠한 것이든 따뜻하게 환영하는 정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Napoleon le petit”(소인배 나폴레옹) 역주. le petit는 사소한, 보잘것없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작다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문맥상 나폴레옹을 조롱하는 별명이기에 소인배로 번역하였다.
사격부대가 그들의 희생자에게 총을 쏠 때, 총을 장전하고 있는 부사관 복장의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은, 얼핏 보면 기묘하게도 이 처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부사관을 기다리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임무는 바로 coup de grace(최후의 일격)를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수염과 날카로운 콧날을 가진 부사관은 나폴레옹 3세와 현저하게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닮음은 의도된 것이다. 중상층계급 배경을 가진 마네는 두 번째 왕국(Second Empire)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네가 Execution의 마지막버전을 그릴 때, 그는 동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처럼, 막시밀리안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대한 책임은 나폴레옹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적들은 루이스 나폴레옹 보난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 1808-1873)를 경멸스러움을 담아 “Napoleon le petit”라고 불렀다.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유명한 삼촌인 나폴레옹 1세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848년에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성공적으로 선출되었는데, 3년 후에 그는 coup detat(쿠데타)의 미덕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의 다음 계획은 유럽 전체에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정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국에서의 입지를 정립한 것과는 달리, 해외에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1860년대 초반에 그는 이태리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자원이 풍부하지만, 부채가 무겁고 부실하게 운영되던 권력 진공상태의 멕시코가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는 독립을 쟁취한 이후로 대지주와 교회, 귀족들로 구성된 보수주의자와 자유·공화세력들 사이에 발발한 내전을 겪으면서, 혼돈과 무정부상태로 인해 황폐해졌다.
개혁파인 베니토 후아레즈(Benito Juarez)가 1861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그와 반대성향이면서 선거에서 패배한 General Miguel Miramon은 성공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자본가들과 법원의 지지를 얻어 프랑스로 이주했다. 나폴레옹은 멕시코에 이웃한 강대국인 미국이 내전을 겪는 동안에 멕시코를 손에 넣을 계획을 고안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보호를 누리며 프랑스에게 경제적인 이윤을 가져다 줄 카톨릭 국교이며 “라틴-아메리카인”으로 이루어진 멕시코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앵글로-아메리카인의 확장에 대항하는 일종의 “방벽”을 아메리카 대륙 내에 설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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