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의 전개 과정과 _ 유학적 성격에 대한 고찰 갑오개혁 1차 개혁 주도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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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갑오개혁의 전개 과정과
탈 유학적 성격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며
조선조 말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났고,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기존의 신분구조가 격동하고 있었다. 행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정이 문란한 상태였고, 외부 특히 일본의 상업자본주의에 의해 토착 경제가 완전히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서구의 문화, 특히 기독교, 천주교의 전래와 기존 유교와의 갈등 등으로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조 말의 만성적인 체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운동이 여러 차원에서 전개 되었고, 신앙의 자유와 사회개혁을 요구한 운동이 갑오농민 봉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갑오농민봉기는 갑오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1894년 갑오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농민군은 충청도와 경상도 및 전라도 일대를 세력하에 두게 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전라도 전주부를 함락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가운데 정치 개혁보다 권력유지에 주안점을 둔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천진조약 天津條約 의 내용 ①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할 것, ②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③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
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양국이 주도한 가운데 양국 간에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써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도록 하고 내정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며 이것의 계기는 계속 지속되어 온 시대적 역사적 개혁요구와 일본의 내정간섭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갑오농민봉기를 진압함으로써 갑오개혁이 시작되어지지만, 유교적 기존체제를 변혁시키자는데 그 목표를 같이 하였다. 즉, 갑오개혁이 일본의 권유와 지원에 힘입어 추진하게 된 것일지라도 조선 유학적 봉건지배의 최후적인 위기단계에서 이루어진 개혁이라는 점으로 말미암아, 그 내용은 유학적 질서에서 진일보한 근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본 논의에서는 갑오개혁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살피고, 어떠한 측면이 탈유학적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해 논한다.
2. 1차 개혁
① 1차 개혁의 주도 세력
198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정권을 축출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정부의 구성원은 유길준, 박준양, 김가진, 안경수, 권형진, 이원경, 이태용, 김학우, 조희연, 박용대, 조인승, 김종한, 어윤중, 김홍집, 김각현, 김윤식, 박정양, 오세창, 서동집, 이윤용 등으로서, 이들이 곧 1차 갑오개혁의 주도인물이 된다.
이들은 민씨 정권에 있어서 소외되던 인물들로, 이전의 주도적 관료층과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성향이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성향과 관련하여 분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친일적 개화파가 있다. 유길준, 김가진, 조희연, 안경수, 김학우, 권형진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지원하였으며, 김가진, 유길준, 안경수는 주일외교관 출신이고 조희연, 권형진은 일본장교가 육성한 교련병대의 생도였다. 조정규, "갑오개혁의 개혁내용과 주체세력의 분석" 『한국동북아논총』제12집 (1999) p.315.
다음은 대원군 파가 있다. 박준양, 이원경, 이태용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갑오개혁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해 갑오개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1984년 8월 중순까지는 어느 정도 대원군의 영향력이 작용하였으나, 이후 이원경과 이태용이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대원군파 세력은 제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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