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임진왜란의 발발과 파천에 대한 선조의 고민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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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진왜란의 발발과 파천에 대한 선조의 고민
-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Ⅰ. 서 론
Ⅱ. 본 론
1. 하성군 이균의 왕위 승계와 태생적 한계
2. 임진왜란의 발발과 선조의 파천
⑴ 임진왜란의 발발과 급박한 상황
⑵ 선조의 초조함과 파천(播遷) 논의
Ⅲ. 결 론
- 대국(大國)의 왕과 소국(小國)의 왕의 근본적 차이
Ⅰ. 서 론
“지금 사람들이 아무런 일도 없는 평지 위에 서서 자기 생각에 따라 옛사람의 시비 득실을 점검해 보기는 매우 쉽지만 일이 실제로 내게 닿았을 때 어찌 옛사람의 발꿈치인들 따라가겠는가?” 이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서애 유성룡의 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유성룡의 말대로 ‘아무런 일도 없는 평지’에 있는 것과 같다. 당장 눈앞에 아무 것도 닥치지 않고 평안한 우리가 옛사람들이 한 것에 대해 ‘시비 득실’을 따져 보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치열한 역사의 중심에 섰던 옛사람들처럼 그들이 처한 상황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어떠한 판단을 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이번 페이퍼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파천한 선조(宣祖)에 대해 재평가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보통 선조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임진왜란 발발에 책임이 있는 무능력한 군주’, ‘서울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임금’, ‘국난 극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성웅 이순신에 대해 시기하는 임금’ 등의 부정적인 것들뿐이다. 그러나 선조 사후 그를 칭하던 존호(尊號)는 무려 38자이다. ‘선조 소경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경명 신력 홍공 융업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조선에서 이렇게 긴 존호는 50자의 영조에 이어 선조가 두 번째이다. 그 다음이 세조가 26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조차도 14자 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라는 책에서 저자인 이한우는 ‘나라의 기본을 바로잡은 공을 이루신 임금〔宣祖〕이시며 윤리를 바로잡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셨으며 덕을 널리 펴셨고 대의를 지극히 받들었으며 국운이 대통하고 큰공을 이루고 나라의 대업을 번성 시켰으며 문무를 숭상하고 뛰어난 예지와 한없는 효심을 보인 대왕이시다’(이한우, 2007)라고 그 의미를 풀고 있다. 또한 선조는 태조, 세조에 이어 세 번째로 조의 칭호를 받았다. 보통 임금이 덕이 있으면 종(宗), 나라에 큰공이 있을 때는 조(祖)를 붙인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입장에서는 선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능력하고 못난 임금이 아닌 훌륭한 임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들이 임금의 감정까지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선조에 대해 잘못 보고 있다고 판단 할 수도 없다.
그러면 임진왜란 발발 때 국가의 최고지도자이며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국가를 유지해야 하는 군주로서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에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과연 그가 결사항전의 자세로 왜군에 대항해서 싸웠어야 했을까. 아니면 우선 왜군을 피해서 파천했어야만 했는가? 과연 그가 무책임하고 생각 없이 도망가는데 급급한 왕이었는가? 한시가 위급한 상황에서 파천은 최고지도자로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아닐까? 파천은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선조의 집권태도를 보았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내린 결론은 아니며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비록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개성, 평양, 의주까지 파천하고 심지어 요동으로까지 파천하려 했을지라도 그는 결국 전쟁을 극복했고 병자호란 이후의 인조와 같이 불안에 떨면서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급급해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후에도 10년을 더 왕위에 있다가 눈을 감았다.
위에서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이번 페이퍼에서 임진왜란 당시 요동으로까지 파천하려 한 선조를 어느 정도 변호해주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으며 조선 최초 후궁의 자손에서 나온 왕이라는 컴플렉스와 유약한 성격으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선조가 임진왜란 발발과 파천 논의에서 취한 행동들에 대해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그를 재 조명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 론
1. 하성군 이균의 왕위 승계와 태생적 한계
명종 22년(1567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명종이 훙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보다 먼저 인 1563년에 13살의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다른 아들도 없었고 자신의 건강도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한 명종이 세상을 떠났다. 명종 20년(1565년)에 명종이 큰 병환을 앓고 가망이 보이지 않자 영의정 이준경을 필두로 많은 대신들이 국본(國本) 여기서 국본(國本)은 세자를 말하는 것으로 국가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국가의 근본으로 불릴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순회세자의 죽음은 국가적인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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