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로마노프 왕조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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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로마노프 왕조의 성립과 왕조 초창기
차르의 전제권이 더욱 강화되고, 러시아가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특히 5대 짜르인 표트르 대제의 통치 시기이다. 안으로는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고 후진 러시아를 근대화시키면서, 밖으로는 팽창 정책을 추구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크게 떨쳤던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를 제국으로 만든 것은 표트르 대제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이전의 로마노프 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표트르 대제 이전의 로마노프 왕조 시대를 모스크바 대공국의 시대에 넣어서 기술하기도 하고, 제정러시아의 역사 기술을 표트르 대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 공작은 이듬해은 1613년,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 사보르를 소집했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그의 부친 필라레트 로마토프는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었으나 돌아와 공동차르로 선언되었다. (1613~1633)
로마노프 왕조는 국민군 및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젬스키 사보르는 이후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해마다 열렸으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차르는 이 기관을 멀리하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법이 없었을 뿐더러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회마다 달랐다. 귀족과 향신도 고나료기구로의 충원을 희망할 뿐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서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된다. 만약 젬스키 사보르를 발전시키고 국민과의 협력을 중시하였다면 러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차리즘의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후진 사회로, 19세기 중반까지 농노제(부역경제)가 지배적이었다. 기계제 대공업이 도입된 것은 1860년이나 가야 하지만 여전히 대지주가 정치력과 경제력을 장악했으며 봉건적 사회가 지속되었다.
1대 차르 미하일 로마노프가 직면한 상황은 참혹하였다. 폴란드와 스웨덴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종전을 위해 땅을 떼어줘야 했다. 1617년에는 영국의 중재로 스웨덴과 평화협정을 맺고 핀란드 만 일대를 넘겨주었으며, 스몰렌스크, 노브고로드 북부도 이듬해 넘겨주었다. 1632~1633년간 스몰렌스크를 되찾고자 폴란드와 전쟁을 했지만 패배했다.
정권을 승계한 외아들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였다(1645~1676).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어 수도원을 자주 찾았으며 16세에 제위에 오르자 ‘젊은 수도사’로 불릴 정도였다. 권력은 황후의 형부인 모로조프(B.I.Morojov)와 밀로슬라프스키 집안으로 넘어간다. 특히 모로조프가 권력을 농단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다.
1648년, 세금을 면제받던 대귀족, 부유한 상인, 황실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지나친 납세 의무에 시달리던 도시 외곽의 상공인들과 빈민들이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서 봉기했다. 모로조프는 상비군에 발포를 명령했으나 상비군은 오히려 봉기한 군중의 편을 들었고, 군중들은 지배계층의 집을 파괴했다. 군중들은 모로조프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차르가 직접 호소에 나서 모스크바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타협되었다. 정부는 불합리하던 세제를 어느정도 개선했다.
1650년,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에서 또다시 봉기가 일어난다. 정부가 스웨덴을 위해 곡물을 조직적으로 사들임에 따라 곡물의 값이 지나치게 오른 데 대한 저항이었다. 프스코프에서는 잠시 인민공화국의 형태가 등장했었다. 모두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662년에는 동전반란이 일어난다. 13년째 폴란드와 전쟁을 계속하여 자금난에 부닥친 정부는 세금을 지나치게 물리고 빈민들로부터도 무자비하게 징세하였다. 특히 세금은 계속 은화로 걷으면서 동화를 새로 만들어 수공업자들에게 동화로 대금을 지불했다. 정부의 짓을 본 대귀족들과 상인들도 동화를 만들어 썼으며, 동화의 가치는 급속히 내려갔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동화 파동 속에 상공인 지대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에 1662년 7월, 동화를 만드는 차르 측근 대귀족들을 비난하는 공고문들이 나붙었고, 이에 자극된 주민들이 황궁으로 몰려가 소위 동전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맞서 차르는 무력을 동원하여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7천명을 죽이고, 15000명을 불구자로 만들어 유배시키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반란자를 뜻하는 B를 이마에 문신으로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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