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으로 본 삼국의 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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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온달산성(溫達山城)으로 본 삼국의 통일전쟁
목차
Ⅰ. 머리말
Ⅱ. 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
Ⅲ. 온달산성(溫達山城)
1. 특징
2. 전략적 가치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삼국시대의 단양(丹陽)은 교통상의 요충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장소였다. 또한 고구려의 남진, 신라 북진의 전초기지로 여겨졌다. 그래서 단양은 삼국시대에 남쪽으로 세력을 뻗으려던 고구려와 북쪽으로 세력을 뻗으려던 신라가 마주하던 주요 싸움터였다. 그러나 온달산성(溫達山城)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전략적인 가치나 여러 대립이 가려져 있는 것 같다.
온달전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온달산성은 교통·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지리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온달산성의 특징과 이 산성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산성을 둘러싸고 어떠한 대립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6C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 확정된 것은 고구려 군이 소백산맥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는 6세기 초이다. 신라는 상주(尙州)를 발판으로 이후 죽령(竹嶺) 죽령(竹嶺)은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동쪽 사면은 내성강(乃城江)의 지류인 서천(西川)의 상류 계곡으로 통하고, 서쪽 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죽령천(竹嶺川)의 상류 하곡과 이어진다. 비록 험한 고갯길이었으나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과 조령(鳥嶺) 충청북도 괴산군의 연풍면과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위치하는 고개이다. 북쪽 마역봉과 남쪽 조령산 사이 말안장 모습의 지형에 만들어진 고개이다. 이 고개는 조선 시대에 영남 지방에서 서울에 이르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고개로, 영남을 벗어나는 마지막 고개이다.
을 넘어 충주(忠州) 지역을 차지하였고, 진흥왕 12년(551)에는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략하였다. 6세기 중엽에는 삼국이 한강 유역의 확보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을 틈타 삼국 관계의 핵심지역인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소백산맥을 방벽으로 삼아 고구려의 공격을 차단했다.
다음은 영양왕대 고구려의 남진양상과 신라의 영역이 어느 방향으로 확대되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기록이다.
·양강왕(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 (溫達)이 왕께 아뢰었다. “생각건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지역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은 몹시 가슴아파하며, 지금껏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주신다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三國史記』 권45, 열전5, 溫達. “及陽岡 校勘 王位 奏曰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百姓痛恨未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授之以兵一必還吾地王許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setId=57942&position=19, 2015.05.12.
·온달이 출정에 앞서서 맹세하였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三國史記』 권45, 열전5, 溫達. “臨行誓曰鷄立峴 竹嶺已西不歸於我則不返也”,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setId=57942&position=20,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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