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고종황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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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 말
2. 지금까지의 고종황제 관한 일반적인 시각
3.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되고 있는 고종황제
5. 맺는 말
본문내용
高宗皇帝는 1863년 즉위하여 1907년 강제 退位 당할 때까지 44년간 寶位에 있으면서 조선말 정치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전제 군주제 사회에서의 왕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高宗皇帝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高宗皇帝는 그 속에서 무언가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 노력은 분명히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일반적인 기술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그를 무능한 군주로 평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다. 8․15 해방 직후에 가장 많이 읽혔다고 하는 국사 개설 책 손진태, 『國史大要』 232면, 1949, 이후 10년간 8판까지 발행, 이태진, 『高宗시대의 재조명』에서 재인용
에서는 高宗을 暗弱한 인물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국내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고 권장되는 국사 개설서인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신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은 긴박한 국제 정세에 처해져 있었건만 이렇다 할 정부의 대책은 없었다. 고종과 민씨 지배하의 정부는 외국 세력에 의존함으로써 그 존립을 꾀하려는 의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국가적인 재정은 더욱 심하여 갔다“

“황제와 대신들이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 고식적인 길을 취하고 있을 때에, 정부의 무능한 시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감연히 싸운 것은 일반 국민이었다. 특히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을 배운 신 지식인층이 그러하였다. 이들은 각종 정치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러한 여러 단체들의 시초를 이루고 또 활동이 가장 맹렬하였던 것이 독립 협회였다.”
참고문헌
이기백, 『한국사 신론』 324쪽, 일조각, 1999
李光麟, 『韓國史講座』, 일조각, 1986
교육부, 『고등학교 국사(하)』 92쪽, 1997
이덕일, 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 우리 역사를 바꿀 34가지 오해와 진실』, 김영사, 1999
이태진,『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姜萬吉, 『韓國近代史』, 創作과 批評社, 1984
H.B.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333쪽~335쪽, 평민사, 1984
嚴燦鎬,「高宗의 對外 政策 硏究」, 강원대 박사 학위 논문, 2000,
朱鎭五,「19세기 후반 開化 改革論의 構造와 展開-獨立協會를 중심으로」연세대 박사 학위 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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