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상사] 인간본성을 통해 예를 강조한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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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8.19 /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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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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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1. 荀子의 생애
2. 荀子시대의 전후 상황
3. 荀子의 思想
⑴ 性惡說
⑵ 禮
⑶ 天
⑷ 논리학
⑸ 정치사상
4. 『荀子』에 대해. . .
5. 中國思想史에서의 荀子
Ⅱ. 맺음말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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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중국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가(儒家)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에 이르러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가면서 여러 사상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상들의 기본줄기로 볼 수 있는 선진(先秦)시대의 유가 중에서도 대표될 수 있는 공자와 맹자, 순자는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자·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그 시대에서의 학문적 명성에 비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바는 많이 퇴색되어지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춘추전국을 마감하는 시기에서 순자 자신만의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의 제시를 통해서 통일되고 안정된 국가의 성립을 바랬던 순자의 모습을 그가 중요시했던 여러 사상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1. 荀子의 생애
순자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史記』의 「孟子荀卿列傳」에서 볼 수 있다.
순경은 조나라 사람인데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나라에 건너와 학문을 닦았다. .
전변의 무리는 모두 세상을 떠났으므로 제나라 양왕 시대에는 순경이 가장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열대부 자리가 모자라면 그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순경은 세 차례나 좨주(祭酒)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 중애서 어떤 이가 순경을 참소하자, 그는 초나라로 떠났다. 초나라의 춘신군은 그를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춘신군이 죽자 순경도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이 일로 집안 대대로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훗날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순경의 시대에는 세상의 정치가 혼탁했으며, 멸망하는 나라와 난폭한 군주가 잇달아 나오고, 성인의 기본적인 도리를 닦아 몸으로 실천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무속에 빠져 길흉화복의 징조를 믿고, 못난 유학자들이 하찮은 일에 얽매이며, 장주(莊周)같은 이들이 우스갯소리 같은 주장으로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했다. 그래서 순경은 유가·묵가·도가의 학설이 펼쳐진 결과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을 살펴 차례로 정리해서 수만 자의 책을 남기고 죽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난릉에 묻혔다. . . .
순자의 이름은 황(況), 순경(荀卿)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시인(時人)의 존칭이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또 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렸다. 순자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의 서쪽으로부터 산서성(山西省)의 북부까지를 점유하였다고 생각되는, 전국시대의 조(趙)나라에서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였다. 이때는 제의 양왕(襄王)의 때로써 제나라의 직하(稷下)에는 위왕(威王)과 선왕(宣王)때로부터 천하의 현재(賢才)들이 모여들었던 터였는데 그 학풍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내유(來由)하는 자들의 수도 많았다. 직하(稷下)란, 제나라의 직문(稷門) 아래에 있었던 학사촌(學士村)을 말한다.
순자는 〈시〉〈예〉〈춘추〉를 잘하였다고 일컬어져 직하에서 주목되었고, 제나라 왕에게 중용되어 세 번이나 학교의 좨주(祭酒)가 되었다. 그는 약 10여 년간 제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사이 진(秦)나라에 가 소왕(昭王)(기원전 306∼기원전 251)에게 유교의 효용을 권하고, 조(趙)나라에 가서는 효성왕(孝成王)(기원전 265∼기원전 245) 앞에서 임무군(臨武君)과 전략에 관해 문답을 교환한 일도 있다. 아마도 그는 때때로 제나라에 돌아와 좨주의 지위에 올랐다고 여겨진다.
그가 다음으로 방문한 사람은 초(楚)나라의 권력자인 춘신군(春申君)(기원전?∼기원전 238)이다. 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이 된 춘신군은 뒤에 북벌하여 노(魯)나라를 멸하고 순자를 난릉(산동성 남부)의 령(令)으로 삼아 새로운 점령지역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선정을 베푸는 동시에 많은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구하였다. 기원전 238년 , 그 때까지 순자를 비호하여 온 춘신군은 내란이 일어나 암살 당하였고,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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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G. Creel 저, 이동인 외 역, 『中國思想의 理解』, (도서출판 경문사,1981).
2. 貝塚茂樹 저, 김석근 역, 『中國古代의 사상가들 弟子百家』, (도서출판 까치,1989).
3. 풍우란 저,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1989).
4. 사게자와 도시로 저, 이혜경 역, 『역사속에 살아있는 중국사상』, (예문서원,2003).
5. 김곡치 저, 조성을 역, 『중국사상사』, (이론과실천,1986).
6. 사마천 저, 김원중 역, 『사기열전』-상-, (을유문화사,1999).
7. 배종호·김학주·안병주 역, 『세계의 사상 ④ 韓非子/墨子/荀子』, (삼성출판사,1990).
자료평가
- ^^
- skinda***
(2006.05.06 11:4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