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약][한국사] 을미지변 대한제국 성립과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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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비지변과 일본이 약속한 자주독립의 허구성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경 민왕후(1897. 10. 13 명성황후로 추존)는 경복궁에서 일본인 자객의 칼을 맞고 절명했다. 시신은 석유가 뿌려지고 나무를 올려놓은 다음 불태워졌다. 타다 남은 시신은 땅속에 아무렇게나 묻었다. 궁궐이 수십 명의 작객들에게 유린당하고 국모가 일본인의 손에 시해당한 만행 사건을 乙未之變이라고 부른다.
이후 일본은 왕후의 죽음도 발표하지 못하게 하고 왕후를 庶人으로 폐위시킨 뒤 김홍집내각을 다시 출범시킨다. 국모의 죽음은 한말 정치사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그동안 일본이 강화도조약 이후 강조해 온 한국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이 거짓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에 왕권강화운동과 진정한 자주독립 운동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고종은 다음해 2월 11일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어처를 옮기고 국모시해를 방조한 김홍집 일파의 체포령을 내렸다. 권력은 金炳始를 비롯한 동도서기파로 이양되었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장차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아 국가를 혁신하고, 서울 도시구조를 경운궁 중심축으로 하여 새롭게 개편한다는 원대한 구상도 담겨 있었다.
고종은 1879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사이 왕후의 국장을 2년 2개월이나 연기하면서 자주와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왕후의 국장은 3년만인 1897년 11월 22일에 치러졌다. 국장 40일 전인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왕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직접적으로 일미지변의 소산이다. 고종은 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황후와 국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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