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금색야차와 장한몽의 비교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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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배경
1) 『금색야차』의 창작배경
 작가와 문학 사조
 사회적 배경
 신파극
2) 『장한몽』의 창작배경
 조중환의 생애와 당시의 문학사조
 1910년대의 조선의 사회상
3. 왜 번역이 아닌 번안인가?
4. 『금색야차』에서 『장한몽』으로 : 번안과정에서 생겨난 차이점
5. 번안의 결과
6. 나오며


※ 참고 문헌

본문내용

3. 왜 번역이 아닌 번안인가?


『금색야차』를 번역이 아닌 번안을 통해 수용한 이유를 알기 위해, 번안을 둘러싼 일재 조중환의 의도와 연재신문이었던 매일신보의 의도, 그리고 그 당시의 문예의 흐름, 마지막으로 당시의 수용계층인 조선의 민중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조중환은 당시 많은 도일 유학생처럼 일본의 신문물을 조선에 알리려고 했던 의도가 강했다고 생각된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연극사조를 받아들여 조선으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조중환 역시 유학 이후의 왕성한 행보가 이와 마찬가지였음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의 근대문학과 그 속에 담겨있는 근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조선의 독자에게 체험케 하고 싶었으며, 이를 위해 소설연재가 가능한 매일신보를 선택하였고 동시에 연극인과 영화인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한편, 1904년 창간 이래 최대의 항일 민족 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가 사실상 폐간되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일대 변모를 거친 매일신보로서는 새로이 구독자 층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매일신보가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후 식민통치에 부합하는 언론활동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독자층 형성이 시급하다고 인식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물론 당시 유일한 조선의 일간지이기에 그러한 노력이 필요가 없을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당시 매일신보가 몇 차례에 걸친 지면 혁신노력을 하는 등 구독자 확보를 위한 ‘대중성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은 구독자 층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는 정명한 증거이다.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와당, 1992. p.79~p.80
매일신보가 연재소설을 위해 꾸준히 지면을 할애하였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1910년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연재소설은 이해조 등의 신소설이었는데 최원식, 『한국근대소설사론』, 창작과 비평사, 1986. p.115
이해조의 신소설은 1910년 10월 12일 「화세계(花世界」연재를 시작으로 1913년 5월 11일 「우주행인」연재 완료에 이르기까지 2년 7개월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재된다.
당시 신소설이 흥미와 오락성이 두드러졌던 것도 대중성에 중점을 두어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새로이 변모되어 출범하는 시점에서 상업적, 정치적 요구사항을 충족할 만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이미 신소설의 한계는 드러나고 있었다. 번안소설이 나오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신소설은 순식간에 쇠퇴, 소멸을 겪게 되는데, 이는 신소설이 새로이 도입된 번안소설보다 한 단계 뒤쳐진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연재소설로서의 흥미와 상업성을 갖추면서 동시에 점점 더 가속화되는 근대화의 양상을 잘 담아내기 위해서는 종래의 신소설이 수행했던 ‘이야기’로서의 요구를 넘어, 조선에 아직 정착되지 않은 ‘소설’이라는 근대문학적 개념을 갖추어야 했으며, 박진영. 일재 조중환과 번안소설의 시대.
이를 위해서는 전근대적 문학양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만 했는데, 신소설은 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문연재 형식에 기반을 두는 신소설은 기존 독자의 관례나 기호에 적합한 내용과 분량에 맞추어 창작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전근대적 서사문법을 형성하게 된다. 이해조에 이르러 신소설은 “구소설로의 복귀” 혹은 “급속한 통속화”가 일어났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대중성과 근대적 변화상을 담아내기에 전근대적 서사문법이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또, 인쇄매체 이전의 읽기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층에 기반을 둔 신소설은 양적 확대가 버거운 서사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분량에 대한 강박은 서사구조의 전반적 파탄을 가져왔다. ‘분량과 구성의 부조화’라는 치명적 한계를, 당시의 신소설은 좀처럼 돌파하지 못했다. 한기형, 「신소설의 양식 특질」, 『한국 근대소설사의 시각』, 소명출판, 1999, 58~64면.

이러한 신소설의 한계를 조중환은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훗날 번안 작업에서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원칙을 밝히는 다음의 글에서 그 사실은 확연히 드러난다.

내가 메이지 문호 오자키 고요의 원작의 곤지키야샤를 『장한몽』이란 이름으로 번안하여 낸 것이 기미년이었으니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그 사이를 흘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 살이다. 지금 같으면 20세만 되어도 조선청년도 선배의 창작과 번역을 통하여 소설과 시 등 문예적 교양을 쉽사리 얻어가질 수 있었지마는 24,5년 전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에는 한 쪼각의 소설, 한 편의 시가를 얻어 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중략) 『장한몽』을 번안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 의견은 첫째 사
참고문헌
1. 기본자료

尾崎紅葉(서석연 역), 금색야차, 범우사, 1992.
조중환, 『장한몽』, 1913.5 ~ 1913.10.1
박진영, 『장한몽』, 현실문화연구, 2007.

2. 단행본 및 논문

김재석, 「『금색야차』와 『장한몽』의 변이에 나타난 한일 신파극의 대중성 비교 연구」, 한국어문학회, 2004년.4
김일영, 「조중환의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대응의식 -희곡 <병자삼인>과 번안소설<장한몽>에서-」, 『문학과 언어』, 문학과 언어연구회 제12집, 1991.5
나까가와 아끼오, 「『장한몽』의 번안 형태에 대한 재검토」, 국어학교육학연구, 2001.1
한광수, 「한국에 있어서의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의 수용에 관한 연구 ; 변모된 히로인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일본문화학보』 3, 한국일본문화학회, 1997.
박진영, 「1910년대 번안소설과 ‘실패한 연애’의 시대 - 일재 조중환의 『쌍옥루』와 『장한몽』」, 2005.8.19.
박진영, 「일재 조중환과 번안소설의 시대」, 2004.8.31.
권두연, 「장한몽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2003.8
김재석, 「한일 신파극의 형성과 특성에 대한 비교연극학적 연구」, 어문학, 제67집, 1999.
김재석, 「근대극 전환기 한일 신파극의 근대성에 대한 비교연극학적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제17집, 2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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