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광해군을 바라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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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1: 광해군의 업적과 과오, 그리고 변론

1.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광해군에 대한 기록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광해군의 업적

가.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활약(1592년)

나. 대동법 실시(1608년 5월)

다. 중립외교 실시

3.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광해군의 과오

가. 영창대군 살해(1614년 2월)

나. 인목대비 폐모논의(1618년 1월)

다. 궁궐 공사(1608년~)

라. 권간(權奸) 이이첨의 중용

4. 광해군을 위한 변론과 한계

Ⅲ. 본론2: 연산군의 업적과 과오, 그리고 변론

1.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연산군에 대한 기록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업적

3.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과오와 연산군을 위한 변론

가. 성종의 후궁을 몽둥이 쳐 죽이다

나. 방탕한 유희를 즐기다

다. 무오사화

라. 갑자사화

Ⅳ. 결론


본문내용
다. 궁궐 공사(1608년~)

상께서 슬프고 괴로워하고 계시는 가운데 상당히 편치 못하신 징후가 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방이 비좁고 옹색하여 조섭(調攝)하시는 데에 적합하지 않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궁장(宮墻)을 수리하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전교하셨는데도 해조(該曹)가 태만하여 거행하지 않았으니, 해당관을 모두 추고하소서. 만약 수리가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거처를 옮기신다면 그 형편이 쉽지 않을 것이니, 우선 거처를 옮겨 섭양(攝養)하는 데 편리하게 하소서.【이것이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군주(君主)의 뜻에 영합한 시초가 되었다. 】
-《광해군일기》광해 즉위년 7월 4일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고 화려하게 꾸몄다.
1608년 즉위했던 직후, 광해군은 왜란 당시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부왕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창덕궁 중건사업을 마친 뒤에는 다시 창경궁을 중수하는가 하면 돈의문 안에 경덕궁(후에 경희궁)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인왕산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는 데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특히 인경궁은 그 칸수가 경복궁의 10배나 되었고 경덕궁 역시 창덕궁과 규모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대규모 궁궐 공사의 후유증은 물자와 인력의 수급 문제, 궁극적으로는 재원 조달과 관련하여 생겨났다. 아직 왜란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궁궐을 건설하기 위해 부과된 부가세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는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조정은 엄청난 재정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재정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공명첩을 발급하거나 벼슬을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신분제의 균열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라. 권간(權奸) 이이첨의 중용

이이첨은 화심(禍心)을 간직하고 거짓 차자를 간포(刊布)하여 성상을 모함하고 화란을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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