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전두환과 박정희의 통치스타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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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전두환과 박정희의 통치스타일 비교에 대하여
상세하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좋은 결과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방문자 여러분의 학업에
무궁한 발전이 있으시고
모든일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1. 서론

2. 쿠데타로 집권 성공한 박정희 vs 전두환
1) 박정희와 전두환 : 집권 과정과 수법 비교
(1) 친일 전력 문
(2)군대 내 위법·범법 문제
(3) 정보장교로서 경력
(4)쿠데타의 전략과 전술
2) 쿠테타 집권
(1) 쿠데타 후 조치
(2) 쿠데타 후 동료 숙청
3) 통치 수법

3.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정치권력 획득
1) 정치사회 장악
(1) 박정희 정권
(2) 전두환 정권
2) 국가기구 장악
(1) 행정․입법․사법부 장악
① 박정희 정권
② 전두환 정권
(2) 정보기구의 장악
①박정희 정권
②전두환 정권
(3) 군부 장악
①박정희 정권
②전두환 정권

4. 박정희 경제정책
1)박정희 5개년계획실패의 분석
(1) 무계획성-"저지르고 보자"
(2) 행정력결여(쉽게 말해 경제에 대해 알짜 무식!)
(3) 부패
2)박정희 경제정책의 모순
(1)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
(2) 빈부격차
(3) 경제력 집중
(4) 지역격차
(5) 천민자본주의의 만연
(6) 관료주의 확대
(7)빚경제
(8)부패공화국
3)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평가
(1)국내 독점자본의 형성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2)조립가공형 산업구조가 정착되었다.
(3)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격렬한 노사분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4)노동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5)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독점자본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양성해 왔다.

5. 전두환의 경제정책
1)가장 역점을 둔 것은 물가안정
2) 오일압박 잘 풀어냄

6. 박정희와 전두환의 경제신화

7. 박정희 신드롬과 한국 민주주의

8. 박정희와 전두환의 공과
1)권위주의 정권의 출현과 지역주의 정책
2) 정권유지를 위한 자집단 중심화
(1)박정희
(2)전두환

9.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아래 글에 거론되는 사람들의 '씨' '전 대통령' 등의 '칭호'는 편의상 생략한다. 지금 왜 '전두환 문제'인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두 군인 박정희와 전두환. 그 중 전두환은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피살되어 역사적 인물이 되지 않고 현존의 인물로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손수 거둬야 할 처지에 있다. 그의 집권기에 떼돈을 번 사람이나 벼락출세한 이들, 사회 원로가 되어 행세한 무리 등은 전두환에 대한 곱지 않은 눈초리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실세 행세까지 치면 그는 박정희 다음으로 오래 집권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도 그만큼 많다. ▲ 전두환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무엇보다 '전두환 문제'는 그의 쿠데타가 공식적으로는 적법성을 상실했는데도 그 마무리가 깔끔하게 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한편 그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박정희의 '정통계승자'다. 전두환은 세지마 류조(瀨島龍三·관동군 참모 중좌(중령))를 충실히 모셨다. 세지마가 박정희의 스승이고 대부인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전두환은 심지어 1979년 12·12쿠데타 때도 당시 일본대사에게 거사를 미리 통고하는 식으로 충성심을 보였다. 그 후 그는 세지마 류조의 충고와 교시를 받들어 민심 수습을 위해 올림픽 개최라는 계획을 세웠으며, 집권 당시 일본 현직 수상 나카소네를 초청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무엇보다 '전두환 문제'는 그의 쿠데타가 공식적으로는 적법성을 상실했는데도 그 마무리가 깔끔하게 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군사 정권의 양아들로 들어가, 거꾸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군사반란과 내란죄로 1996년 기소해 유죄 판결을 받게 했다. 거기까지는 잘 나갔지만, 김영삼은 그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물러나 김대중에게 바통을 넘기고 말았다. 후임 대통령 김대중은 그들을 특별 사면했고 모든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전면 무효화'에 이르는 합법적인 조치를 통해 인적 청산까지도 전·노 두 사람의 개인적 과오 문제로 축소되고 말았다. 온정주의적 사후 변칙 처리가 전두환 문제를 원점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전·노에 대한 특별사면은 김대중 개인의 입장에서는 관대함과 군자다운 용서라는 덕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치는 봉건적인 '삼국지' 시대의 정치 감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중남미 국가의 헌법을 보면 전임 대통령이나 주요 공직자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하고 있다. 또 닉슨의 몰락으로 후임 미국 대통령이 된 포드는 첫 번째 조치로 닉슨을 사면했는데, 그것은 그의 최대 실책이자 과오가 됐다. 이장에선 전두환과 박정희의 통치스타일과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비교 정리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직접 서술] 수업 중 제출한 자료와 검색 통해 정리한 것에 제 의견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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