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주도 경제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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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은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온 뒤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 줄곧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 방식을 채택해왔다. 현 시대적 흐름이야 수출주도 정책이 일반화 돼 있지만, 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수출주도전략은 생소하고, 선택되지 못하던 것이었다. 당시 한국보다 잘 살던 개도국 포함 여러 국가들, 특히 그 중 남미에서는 수입대체화 전략이 유행하였었는데, 이것은 보호무역을 바탕으로 자국의 산업기반을 다지는 것으로써 당시의 성장 전략으로서 가장 보편적인 흐름이며, 성과를 보이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우리나라는 과감하게 수출주도전략을 선택하였고, 크게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수출주도 정책의 장점은 무엇일까? 바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의 협소한 시장에서 벗어나 넓은 시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더 높은 성장 가능성을 가질 수 있으며,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는 비효율적인 기업이 아니라 외국의 기업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스스로 성장하지 않으면 자생할 수 없는 기업환경을 조성하므로, 결론적으로는 기업 경쟁력을 증가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내용으로 성장해 왔을까?
무역추진기-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열약한 경제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고도화된 산업을 시작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섬유, 가발, 합판 등의 노동집약적 경공업 상품에 매진하였다. 이 때부터 박정희 정권은 수출장려를 위해 수출촉진기구를 설치하고, 수출월례회의를 하고, 수출우대금융, 환율 조정 등을 통해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을 적극 꾀하였다.
무역촉진기- 60년대의 성장도 괄목할만한 성과였지만 7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고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시장진입에 따라 수출이 어려워져, 경공업을 통한 경제성장은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미군감축에 따라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종합적인 이유에서 중화학 공업으로의 전환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한국이 중화학 공업을 시도하는 것은 큰 도박이었다. 때문에 투자를 선뜻 해주는 곳도 없었고, 국내의 반응 역시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참여한 베트남 전쟁의 보상으로 주어진, 베트남 건설사업 참여, 국방물품, 차관, 군사 급여 등을 통해 외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또한 농업에 사용했어야 할 대일청구권 금액의 상당 부분을 중화학 투자에 사용하는 등 온갖 수단을 통해 외자 유치를 함으로써 중화학 공업 성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론 큰 성과를 보였다.
60년대 주요 수출 상품은 의류, 합판, 가발이였으나 70년대 수출상품은 섬유류 다음으로 전자제품, 철강제품이 차지하게 될 정도로 중화학 공업이 발전한 것이다. 70년대 대표적인 중화학 산업 중 으뜸인 포항제철은 설비가동 1년만에 투입된 외자를 모두 상환하고도 흑자를 기록하는 쾌거를 얻어냈다. 이러한 성장까지 8·3조치, 총자원 예산제도 등으로 수출기업에 대한 집중육성이 있었고, 이러한 국내 가용재원을 넘어서는 투자확대들로 인해 경제불안정, 국민희생 등의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무역신장기, 확대기- 60-70년대의 수출성장을 기반으로, 80년대에 급속한 공업화가 시작된다. 80년대 중반에는 공산품의 수출비중이 95%수준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 가운데서도 중화학 공업의 수출비중이 60%를 넘어서게 된다. 이렇게 중공업의 수출비중이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79년부터 중공업의 수출주도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70년대 초에는 수출산업으로서의 중공업의 육성이 있었고, 80년대에는 이를 통한 본격적인 수출 발진을 한 시기라고 보면 된다.
특히 80년대 중반에는 10대 전략산업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시멘트, 도자기, 섬유)를 중점으로 하여 5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목표로 한 시기이며, 수출증가율이 그 성과를 보여준다.
80년대 후반에는 오히려 공산품의 수출비중이 약간 낮아지고, 중공업이 차지하던 비중은 5%정도 감소했다. 이러한 이유는 경제 안정화, 시장 기능 활성화에 따라 기존의 과도하던 수출 산업집중육성이 완화되고, 선진국의 수입규제 등에 따라 중공업 수출이 둔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6년부터 3저 현상을 통해 전체적인 수출량이 크게 늘었고, 수출 주도전략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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