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 북벌의 실패를 통해 바라본 당시 조선사회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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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북벌 추진 당시 조선의 배경

시대적 배경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

사상적 배경

명분론

형세론

주전론

주화론

학문적 배경


북벌 당시 성리학의 형태


북벌론

북벌 추진 배경

북벌 추진에 대한 견해

북벌 추진의 노력

북벌 추진의 한계


북벌 추진의 의문점


예송논쟁

논쟁의 학문적 배경

논쟁의 발발

논쟁의 배경

논쟁의 발전


예송논쟁이 갖는 의미


결론

본문내용
1-1-5. 백성들의 생활 - 조세제도.
조선시대 당시 국가재정은 주로 조세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조세수입은 전세(田稅) 역(役), 그리고 공납(貢納)이 그 기본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줄어든 토지의 수와, 지주전호제(토지의 사유화)의 확대로 농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 지고 있었다. 전세는 농토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과전법에서는 1결에 최고 30두(斗) 까지만 받게 하였고, 세종 때에는 이를 더 낮추어 1결에 최고 20두, 최저 4두를 받되,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구분하여 수취하였다. 정확한 전세의 부과를 위해서는 농토의 정확 한 파악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서 양전(量田)사업이 20년마다 실시되어 양안(量案)이라는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토지대장이 소실되어 왜란 후에는 3분의 1로 감소되어 있을 정도였다. 다음 역(役)에 있어서는 국가의 토목사업 등에 동원되는 요역과 국방을 맡는 군역의 두 가지가 있었다. 역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60세까지의 정남이었고,16세기에 와서는 역의 대가로 군포(軍布) 2필을 납부하였는데, 1년에 2필의 포를 납부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어린아이를 정남으로 편입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添丁), 죽은 자에게 대하여도 여전히 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등의 부정이 유행하였고, 무거운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는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척 동리에 부담시키는 인징(隣徵) 족징(族 徵) 동징(洞徵)이 가해졌다.
공납은 각 고을을 단위로 하여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을 그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고 거두어서 바쳤다. 그런데, 공납은 현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납입 저장 운반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이를 계기로 이른바 방납(防納)이라는 농간이 행해져 국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전세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 보완을 위해 광해군때부터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나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100년이 걸릴 정도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는 농민의 피폐함과 상관없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조선 지배층은 반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2. 사상적 배경
초기 명청 교체기 시기에 대립된 사상은 명분론과 형세론이었다. 명청 교체기 전부터 내려오던 화이론이나 모화사상에 힘입어 나타난 명분론이 형세론에 비해 강세를 이루었다. 이후 인조 집권 시기에는 명분론은 주전론으로 형세론은 주화론으로 발전되어 그 대립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그 후 효종 집권시기에는 북벌론이 크게 대두되었고, 그와 대비되는 북학론도 나타나 미약하게나마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1. 명분론
① 화이론
- 중화와 이적(오랑캐)의 구분을 내용으로 하는 화이분별의 관념에서 이적과 대비되는 중화의 실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역적 개념, 종족적 개념, 문화적 개념 등 세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중 중심이 되는 기준은 문화적 요소라는 것이 대다수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즉, 중화와 이적의 중요한 차이는 거주 지역이나 혈연적 종족이 아닌 유교 정치이념의 시행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화이론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이적에 대한 중화의 우월성을 논하는 중에도 이적이 중화로 변모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악을 갖추지 못한다면 중국이 이적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예악을 갖춘다면 이적이 중화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신유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는 주자는 “중화이면서 예를 갖추지 못한다면 오랑캐만도 못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중화와 이적의 차이는 예의의 유무로 결정된다고 단정하였다. 즉 화이론은 문화적 요소를 화이분별의 핵심 기준으로 이해하였고, 이에 더하여 유교문화의 정수인 예의의 강조를 통해 화이분별의 관념을 인륜질서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참고문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로 - 웅진 지식하우스 - 박영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김영사 - 이덕일
한국사 이야기 12권(국가 재건과 청의 침입) - 한길사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권(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 한길사 - 이이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 석필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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