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개론 3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병자호란
병자호란에 발표를 들으면서 다소 기대가 됐던 것은 사실이다. 바로 전 조의 발표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 다음 조가 부담감이 상당했을 터이기 때문에 나름 기대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일까, 조금은 실망스러운 발표였다고 보인다. 먼저 가장 PPT에 관해 앞의 조들보다도 너무나 무성의해보였고 조끼리 하는 발표임에도 혼자서만 거의 모든 부분을 맡아서 하는 듯한 인상은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발표가 시간 관리를 잘 못했던 점이 유일한 아쉬움으로 꼽혔는 것을 알았을 텐도 이번 발표역시 시간 조절에 실패했다는 것을 또 감점요인으로 꼽았다.
그래서 나름 개인적으로 병자호란을 간단히 설명해보고자 배경, 경과, 결과, 영향과 의미 등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다른 병자호란에 관한 자료 역시 접근해 보았다.
1636년(인조 14)에 청이 조선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 이 전쟁에서 조선이 패함으로써 명과 관계를 끊고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외교 질서가 수립되었다.
(1)배경-배경은 새로운 곳에서 찾아보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2)경과-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3)결과-전쟁 동안에 조선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최명길이 주도한 주화론이 김상헌과 정온이 이끈 척화론을 누르고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청의 요구가 조선 왕이 직접 항복 의식을 치르고 척화 주모자를 결박해 오라는 강경한 것이여서 말썽이던 중 1월 21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세자빈과 대군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의식을 갖추어 항복했다. 청군은 돌아가면서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등을 볼모로 잡아갔다. 또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4)영향과 의미-조선의 지배층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자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청을 정벌하겠다는 북벌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내정의 독자성을 침해박지 않는 정도에서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줄곧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동안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과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백성의 희생을 줄이려면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화론이 맞섰다. 이 주장들은 국가 운영에서는 서로 보완적이었지만 개인으로 서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였다.
사진자료를 많이 첨부하지 못한 점과 너무나 텍스트 위주의 단편적인 발표가 꽤나 지루한 감을 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관해 열심히 답변하는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나름 혼자서 공부를 많이 하고 발표를 하는 듯한 모습은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국어국문] 풍자 소설에 나타난 생활상
  • 3) 현대적 변용조선시대의 양반은, 오늘날로 따진다면 상류층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양반의 신분이 세속인 것처럼, 상류층이란 것 또한 대부분 부모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양반전에서 부자의 모습은, 한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된장녀 신드롬과 어느 정도 비교해 볼 수 있겠다. 부자가 양반의 신선 같은 생활을 부러워하던 모습은, 된장녀들이 상류층의 생활을 동경하고 모방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충

  • 속미인곡 가사 콘텐츠화
  • 3) 가사의 변개 과정고려말기 종교적 성격을 띤 작품으로 출발한 가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국문시가의 핵심갈래로 자리 잡으면서 매우 복잡한 전개 양상을 나타낸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초기 불교적 성향을 띠던 가사의 창작층이 신흥사대부로 옮겨가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변화하였고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쟁 때문에 커다란 변개를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가사의 변개 과정을 시대로 구분해 본다면 발생기, 전성기,

  • [정책학원론] 다양한 관점에서 국가관의 분류와 국가혁신의 의미 도출
  • 개론』, 1995: p37) Ⅳ. 정책학적 관점에서의 국가관과 국가혁신 국가혁신이란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부응할 수 있는 국가모델을 창조하기 위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혁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국가혁신론은 전통적 정책이론과 현대적 정책요구 사이에 생기는 이론적 갭(gap)을 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권기헌, 『국가혁신론』, p43) 국가혁신은 크게 효율성, 민주성, 성찰성의 제고를 목표로 하며, 이러한 국가

  • [국문학] 고전 수필의 이해와 현대적 양상
  • . 어느 순간, 그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설음이 울림을 가져온다. 수필창작도 전통적 문법에서 벗어나 사물과 대상을 새롭게 보는 작가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 참고 문헌『국문학개론』, 2008, 김광순 외, 새문사『고전수필개론』, 1998, 권 호, 동문선『한국수필문학사』, 2000, 장덕순, 새문사『한국고수필강독』, 2007, 이동근, 대구대학교출판부『한국고수필문학』, 2001, 신해진, 월인『한국고전문학론』, 2009, 최래옥 외, 제이앤씨

  • 인문어학 내게 의미 있는 작품 박씨전
  •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재창작을 제대로 하게 된다면 박씨전은 새롭게 재조명을 받으며 현대인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참고자료장재화, (고전읽기 004 박씨전)낭군 같은 남자들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도서출판 나라말, 2004김혜니 外, 꼭 읽어야 할 고전소설 38선 1권, 타임기획, 2005김광순 外, 국문학개론, 새문사, 2003참고사이트네이버 지식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minbaek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