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열강의 침탈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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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구한말 열강의 침탈과 대응
1)병인양요
의의: 1866년(고종 3)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전개: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신미양요
1871(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하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당시 대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아직 봉건적 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고종 3)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 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당시 톈진에 체류 중인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고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윌슨,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 영국인 호가스 및 그리스도교 선교사 토머스를 통역으로 삼아 19명의 말레이시아인 및 청국인들을 태우고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내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내항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자명종 등과 쌀·사금·홍삼·호표피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의 요구는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어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절되었고 그들에게 즉시 출국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조선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한사정 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조총과 대완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 박춘권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내었다.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이렇게 여러 날이 경과하는 동안 평상시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행동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강도·약탈·총포격 등의 강압적인 행동을 자행하여 주민들 중 사망 7명, 부상 5명이 생기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에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하여 화공 및 포격을 가하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토머스를 비롯한 전승무원 23명이 소사하거나 익사하였다. 당시 조선의 흥선대원군 정권은 이 사건과 동년의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양이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였으나 이 사건의 진상이 뒷날 밝혀져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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