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징용 문제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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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징용 문제-위안부
2017년 5월 27일 오후 1시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진앙 현석관 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서 교수님이 올려주신 논문과 인터넷의 자료들을 보고 해남도 사건, 사할린 강제 동원, 위안부, 마루타 사건 등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위안부’에 대한 보고서를 써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시절,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우리 나라에서 강제로 동원했다.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임금도 제대로 지불 받지 못하면서 탄광, 군수 공장, 공사장 등에 가서 힘들게 일을 해야만 했다. 이런 인권유린, 강제 인력 수탈 중 하나로 ‘위안부’ 가 있다. 일본은 강제 징용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 라는 뜻을 가진 ‘정신대’ 라고 불렀다. 이 정신대 중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정신대가 ‘여성 정신대’ 이고, 다시 이 여성 정신대 중에서 일부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 정신대가 ‘위안부’ 인 것이다. 최근 유엔 인권 위원회는 이런 ‘위안부’ 라는 명칭 대신, ‘일본군 성노예’ 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함으로서 일본이 강제적으로 동원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 데만, 심지어는 일본 사람들까지 위안부로 끌려갔다.
처음 일본군들이 위안부대를 창설 한 것은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일으키면서 부터이다. 당시 위안부를 만든 이유는 일본 병사들의 강간이 너무 심화되어서 인데, 이때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말한 오카무라 중장은 나중에 “예전에는 위안부라는 것이 없었는데 부끄럽게도 나 자신이 위안부의 창설자이다. 현재 각 병단은 거의 전부가 위안부단을 수행시켜 병참의 1분대로 되어있는 형편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안부로 끌려간 많은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 정기검진을 하는데 이날이 위안부들의 유일한 휴일 이였다. 이들은 외출도 혼자서는 못하고, 그 외출도 위안소 출입 이외에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버티지 못하는 위안부들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시도를 하는 도중에 걸리면 총에 맞아 죽거나, 온 몸에 문신이 새겨지거나, 칼로 머리나 가슴이 잘리고, 이렇게 죽은 사람들을 가마에 삶아, 삶아서 나온 물을 다른 위안부 여성들에게 마시게 하는 등 상상도 못할 보복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직업 매춘부들을 돈을 주고 사왔지만, 시간이 지나고 직업 매춘부들은 성병을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로 인해 바람직하지 못하며, 위안부의 연령은 어릴수록 좋고, 일본인 보다는 조선인이 더 어리고 대부분의 조선인이 초심자라 흥미롭다는 말도 안되는 의견이 나오자 처음에는 도시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인신매매를 해서 데려오고 시간이 지나자 군대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고 속여서 농촌에 있는 어린 여성들에게 접근해 데리고 갔다. 조선 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면장 책임 하에 위안부를 동원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 하고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일명 ‘사람사냥’ 으로 위안부를 충원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가, 집에 있다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끌려가 위안소에 ‘배치’ 된 것이다. 보급품 수송차량에 실려 가는 동안 강제적으로 불임 수술을 받는 등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위안소에 가서도 차별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위안부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시설이 안 좋은 곳에 배치된 것이 그 예이다. 나중에는 위안소가 부족하자 민간인의 집, 심지어는 부처님이 있는 사찰까지도 위안소로 사용되었다. 일본군들의 위안소 이용시간은 1일 1시간으로 제한되었고, 단체로 이동하며 이용했다. 이들에게 특별 콘돔이 지급되었고, 이 콘돔을 다시 사용 하기 위한 세척용 과망간산칼리 수용액도 지급되었는데, 위안부들은 하루 평균 20명이 넘는 일본 군인들을 상대하면서 이를 직접 소독해 사용했다.
가장 충격적 이고 안타까웠던 일화는 16살 소녀일 때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자, 귀를 맞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왼쪽 귀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 는 할머니의 경험담 이였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던 할머니는 “알아서 가고 싶은 곳을 가라”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위안부 친구들과 백두산을 넘어 두만강을 건너 직접 고향과 집을 찾았으나, 가족들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해방 후에도 수많은 위안부 여성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수치심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도 위안소에 있을 때 임신을 하지 못하게, 생리를 못 하게 자궁을 떼어버리고, 임신을 하면 아기와 자궁을 함께 들어내며, 수많은 강제적인 임신과 낙태의 반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힘들었다.
아직도 일본은 위안부가 합의에 의한 것이라면서 사과를 하지 않고,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10억 엔이라는 돈을 받고 일본과 합의를 해버렸다. 진심어린 사과를 받지도 않고 10억 엔을 받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시켜버렸다. 나는 일본이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용서를 못 받을 지라도 계속 해서 위안부뿐만 아니라 다른 강제징용들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와 피해를 준 다른 많은 나라들에게도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보고서를 쓰면서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 보다 더 충격적이고 슬픈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할머니들의 경험담과 인터뷰 내용을 보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에 비해 지원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생각 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인 ‘귀향’이 재정적인 문제로 개봉을 하지 못해 기부금을 받는다는 뉴스 기사를 보고 심각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재집권을 하면서 일본 총리와 의 만남에서 “한국 국민이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라고 하자 니카이 간사장이 공감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우리끼리 합의 한다고 과거의 일이, 위안부 할머니와 다른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일본의 원활한 외교적 관계를 위해서 하루 빨리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 징용 문제가 해결되고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많은 방문, 지원을 통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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