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의대 마도 정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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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REPORT
제 목: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에 대하여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
1. 머리말
최근 불거지고 있는 문제인 독도 영유권 분쟁, 중국의 동북공정 등 한국의 지리적 위치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영유권 분쟁이나 역사적 분쟁이 끈이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종대에 있던 대마도 정벌에 관한 내용은 꾀나 흥미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타국과의 관계에 있어 먼저 한국이 다른 국가를 공격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 원인과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한 가지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어 주제로 삼게 되었다.
2.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는 건국직후부터 대외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다각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왜구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의 중앙정원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중앙정권에 대해 왜구의 해적행위를 금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반면, 동시에 왜구지역의 유력한 세력과 외교교섭을 벌여 왜구의 금지를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변경지역의 방위체제를 견고히 하는 한편, 평화로이 왕래하는 왜인에 대하여는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가하였다. 조선에 투항하는 자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주고 심지어는 관직을 주는 등 회유하여 수용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외교차원에서 해결이 가능했고 그에 따라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면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대일정책의 결실이었다. 특히 조선왕조에서는 대모도 종(宗)씨를 이용하여 조선과의 통교를 원하는 모든 세력을 통제해간다는 방침에 의하여 대일관계를 전개해 나갔으며 이러한 방침은 조선후기에까지 계승되어 조일 관계에 있어 대마의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의 기미정책에 따라 조선과의 통교권을 확보해 가면서 대마의 경제적 빈곤을 해결해 갔던 대마도주는 종정무였다. 종정무는 조선으로부터 소위 도항증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 발급권을 위임받아, 이것을 행사함으로서 대조선관계의 기득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 종래의 왜구 세력은 점차 외교사절이나 무역인으로 전화되어 갔고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1418년 4월 대마도주 종정무가 죽고, 그의 아들 종정성이 어린 나이로 뒤를 잇자, 실권은 왜구의 수괴였던 좌우문대랑이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에 실망과 우려는 하였는데, 역시 도내의 기근이 일자 그는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해적행위로 빈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419년 4월 대규모의 해적단을 조직하여 명을 노략 잘하면서 중간에 조선의 충청도와 황해도 연안지방에 침입하였다 세종 004 01/05/13(정사) / 황해도 감사가 왜선과의 대치 상황을 보고하니 김효성, 장우량 등을 더 파견하다.
세종 004 01/05/10(갑인) / 왜적을 방비하지 못한 충청좌도 도만호 김성길이 참형당하다.
. 세종조의 대마도정벌은 이 침략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3. 왜구침입과 정벌준비
1419년 5월 4일 충청도 도절제사 김상으로부터 왜선이 결성지역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고, 5일에는 전라도 도절제사로부터 왜선 39척이 명을 행해 가면서 근처의 섬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7일 충청도 관찰사 정진으로부터 5일 새벽에 충청도 비인현에 왜선침입이 있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5일 새벽,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에 돌입하여 우리 병선을 에워싸고 불을 살라서 연기가 자욱하고 서로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왜인을 우하게 접대하기가 그지 없거능 다시 우리 변경을 침입니 신의 없기가 이와 같아 …… 미처 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석 32척이 우리 병선 7척을 빼앗아 불을 질렀으며, 이때 우리 병사는 태반이 사망하였다.” 세종 004 01/05/07(신해) / 충청도 비인현에 왜적 50여척이 침입하다.
당시 왜적이 침입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 후 해주에서 식수를 구하기 위해 상륙했다가 포로가 된 왜구의 공술에 자세하다. 침입의 이유는 대마에 기근이 닥치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의 절강지역에 노략질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왜구는 6월에 요동반도의 망해과를 습격하였지만, 명의 도독에 의하여 생포 130인, 참수 천여 인이라는 피해를 보고 대파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이기훈(1997),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 지성사.
전쟁기념사업회(1992), 『한민족 역대 전쟁사』, 행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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