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우드 레포트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3페이지 / fileicon doc (MS워드 2003이하)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울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곁엔 그의 <퍼펙트월드>가 있었다. 시험을 못보고도 꾹 참고 돌아와서는 데크에 테이프를 넣고 필립과 버치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장면에 이르러야 비로소 맘놓고 울곤 했다. 시험을 망쳐서 우는 것도, 집안사정이 안 좋아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뭐 잘한 게 있어서 우냐는 질책에 그저 한 아이와 그 아이에겐 착한 탈옥수의 우정이 끝나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이라 항변할 수 있었고, 내내 슬픔의 핑계거리로 남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내겐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 내가 견딜 수 있는 의미였던 단 하나의 영화였다.
퍼펙트월드 - 이스트우드 #1
그의 영화는 나른하지만 눈물을 자아내는 묵직함을 지녔다. 그리고, 그 묵직함은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해서, 현상을 바라보는 오랜 인생의 관찰자의 눈으로 끝맺는다. 내 인생을 지키는 버팀목이자 분출의 통로였던 <퍼펙트월드>도 탈옥수와 아이의 눈물겨운 이별과 죽음을 넘어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타인을 바라보는 소시민의 무력함이 느껴지는 건 그저 머리가 컸기 때문인가.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아이들과 다른 성장과정을 거쳐야 하는 한 아이(필립)와 부모세대부터 규정되어 버린 범죄자인 성인(버치)의 버디무비이기도 한 이 영화의 의미심장함은 그들만의 여행에 있지 않다. 미국인을 부적응자와 범죄자로 만들어버린 사회와 궁지에 몰아넣고 쥐몰이하듯 쫓는 미국의 수호자들이 보이는 행동에 있다. 그들을 따라다니며 관찰하듯, 현상을 파악하려 노력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은 그와 행동을 같이 하는 추격자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범죄자의 손에서 가녀린 어린아이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그들의 우정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총질하는 미국인들 중 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나라고 자문하는 자성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조용히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인을 대표하는 추격자들은 결과론에 집착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심각한 사회적 영향을 끼칠 현상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고, 또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끊임없이 양산될 미국의 부적응자들과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휴먼드라마의 틀 안에 제대로 끼워맞추고 있다.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스트우드 영화의 미학은 스타일에 있지 않다. 영화 저변에 깔린 의식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의 영화의 의미를 찾을수 있으며 <퍼펙트월드>에서 그는 한걸음 물러선 추격자의 위치에서 미국을 바라보고, 일갈한다. 대사도 별반 없이, 그저 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과 시선으로. 먼저 변화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이다.
필립과 버치는 미국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을 때, 비로소 행복했고 그 안에서 이상향 즉, 퍼펙트 월드를 발견한다. 죽음과 헤어짐 직전 그들의 마지막 포옹마저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씬에서 미국사회의 “온당한 폭력성”을 읽을 수 있다. 그 순간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스트우드의 <퍼펙트월드>는 어디일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 이스트우드 #2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가시적인 영화였던 <용서받지 못한 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었다. <퍼펙트월드>에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포하고 있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그가 전면에 나서는 영화들이다. 다만, 전자가 폭력미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끝에 다시 주류로 편입되어야 했던, 혹은 편입되어지는 과정을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웨스턴 무비의 양식을 빌려 가감없이 표현했다면 후자는 마치 휴식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품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보여주는 갑작스레 찾아와 쉽게 떠나지 않는 젖어드는 감정의 미학은 이스트우드 영화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외관상 중년의 불륜을 그리고 있지만, 부도덕해보이거나 위험해보이지 않는 건 분명 감독이 살아온 시간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것도 아니고, 빠지고 싶어서 빠진 것도 아닌 그저 운명처럼 다가온 늦깍이 사랑에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리고 미국은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서 만들어낸 소품 같은 영화. 프란체스카(메릴스트립)의 자녀들은 그녀가 죽은 뒤 남겨진 유품에서 그녀의 늦었던 사랑에 대한 배신감과 비도덕적이라 비난을 주저하지 않지만, 결국 그들을 이해시키는 힘. 그런 것이 이스트우드가 생각하는 인간과 사랑의 힘이 아닐는지.
자신의 차 안에 앉아 프란체스카가 오기를 기다리는 킨테이드(클린드 이스트우드)의 손짓과 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며 남편의 차 안에서 손잡이를 꼬옥 잡아 고민하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다. 같이 늙어가는 비감과 그것들 때문에 이끌림대로 행동할 수 없는 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열정이 남아있다면 그대로 좋다라고 하기엔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사회가 그에겐 너무 지루했나보다. 원작소설보다 더 애절하게 잡아끄는 “젖어든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스트우드식 사랑법. 그는 도착할 때와 똑같이 떠나지만 그가 남긴 사진 속 메디슨 카운티 다리 저편에 그가 바라는 아늑함에 대한 염원이 남아있다. 킨케이드가 사진은 남겼듯 그도 영화를 남김으로.
그리고 더 - 이스트우드 #3
그의 감독으로서의 이력은 <앱솔루트 파워>와 <스페이스 카우보이>까지 연장선을 그린다. 냉소적이고 과격한 법집행자였던 더티 하리만큼은 아니지만 <앱솔루트 파워>에서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에 맞서는 도둑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그는 일순 관찰자에서 실천가로 변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작과 연출을 겸한 이래, 꾸준히도 성찰하고, 반성해왔던 미국영화와 사회에 대한 관망적 자세에서 행동할 때라고 느낀걸까.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는 고철 스카이랩, 그것들을 분해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한 노비행사들의 희생이라는 스토리는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가진 이스트우드가 아니다.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출세한 이스트우드는 이제 우주선에 안장을 얹고 우주로 달려나가지만 그것은 우주에 대한 동경도,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종착역까지의 긴 여정을 기다릴 줄 알고 느릿하지만 나아가려는 그의 의지이다.
그는 느리다. 그의 느릿함은 아랍영화의 알아채지 못하는 생동감을 감춘 느릿함과 또 다른 의미이다. 아랍영화의 느릿함 속에 사회전체 속에서 그들만이 볼 수 있는 아릿하고, 찡한 억척스러움과 생활이 녹아있다면 그의 느릿함은 인물의 행보, 혹은 그를 지켜보는 관망자를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인식과 패러다임의 묵직함이 있다. 성급하고 무리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젊은 세대에 대한 우려이기도 한 그의 영화관, 그의 영화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시간이 주는 지혜 역시 버릴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스페이스 카우보이>에서 그들은 천천히 고민하고, 천천히 움직이지만 그것이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 말하지 않으며, 카메라워킹과 테이크 길이에서도 그 의지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 미국은 짧은 역사 속에서 너무 성급하게 달려왔고,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려고 하고 있다고 말한다. 버려서는 안될 것들, 그것들을 버림으로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반성은 그의 모든 영화와 맞닿아 있다.
나이 칠십줄의 황혼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거장이란 이름은 시간이 거저 준 것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그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긋하지만 예리한 관점은 그가 미국영화 속에서 지나온 시간이 큰 몫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시간 속에 그가 구축해낸 독특한 세상을 보는 시선은 너무나 명확하다. 스타일에 연연하지 않고, 이야기와 캐릭터만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부여한 시간의 지혜만으로 묵직한 감동을 주는 감독은 흔치 않다.
그와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팀 로빈스 같은 감독에게 그의 영화는 형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팀 로빈스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니지만 <데드맨워킹>이나 <밥로버츠>가 보여주는 캐릭터의 설명법이나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미국인의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성찰은 이스트우드의 그것과 꼭 닮아있다. 그와는 배우 겸 연출자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이스트우드 영화의 진지함과도 일맥상통한다. 특히 <데드맨워킹>은 사형수를 동정하거나, 순교자로 그리지 않으며,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려고 들지도 않으면서 결국 인간의 죽음은 시행자의 공사를 떠나 살인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피력하는데 이는 <퍼펙트월드>에서 이스트우드가 말하려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각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장면에서의 리얼타임 씬에서 시너지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영화사에 획을 그었다기보다, 그가 사는 사회에 획을 그으려는 시도로서의 영화를 만든다. 그의 공식홈페이지의 말미에 그가 추구하는 카메라 뒤에서의 모습에 대한 언급이 구구절절이 쓰여있다. 그 중 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단어는 Style, Realism, humor, melodrama 가 아니다. Serious라고 표현되어 있는 단어가 뒷받침하는 “STRIKE”일 것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heart of Audience에게 주는 “울림”이라고 할까. Fin.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