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의외 교통상 센터 재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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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조선에는 재포, 부산포, 염포라는 무역의 중심지가 있었다. 삼포 중 가장 번성했던 재포, 현재의 진해시 웅천동은 예나 지금이나 외지인들로 북적거린다. 영의정과 예조판서를 지냈던 신숙주는 대일외교를 담당하며 해동제국기에서 경험을 토대로 삼포의 갖가지 정보와 지침을 수록하였다. 그 책에는 왜인들에 대한 여러 명칭들이 나오는데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 순수하게 무역에만 종사하기 위해 온 흥리왜인, 그리고 조선인으로 귀화한 향하왜인 등 왜인을 분류하는 다양한 명칭이 등장한다. 이런 것을 볼 때, 당시 얼마나 많은 교류가 일본과 있었는지 또 관리에 신경을 썼는지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마도에 있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보면 대마도의 왜인들이 조선과 교류를 하기 위해 조선어를 공부하던 책과 각종 교지들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마도는 ‘배고픈 섬’이었다. 전체면적의 97%가 산이어서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산비탈의 좁은 경작지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마도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외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방법뿐이었다. 대마도는 일본 규슈와는 124km 떨어져 있는 반면 조선과는 53km로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한반도는 고려시대 1223년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에 이르기까지 400차례나 왜구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하지만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을 통해 대마도는 조선의 속국과 같은 처지가 되면서 무역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다. 대마도는 조선에게 평화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교지와 인장을 받고 정식으로 무역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제한적으로 허락하게 되면서 그들은 조선의 말을 배우고 교지를 받게 되었으며 드디어 식량과 원포를 조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들을 가리켜 삼포왜인이라고 하였다.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었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조선에는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삼포왜인의 수가 450호를 넘어서면서 대마도의 최대도시 인구수보다 더 많은 왜인들이 넘어와 생활하고 있었다. 이렇게 세종대에 만들어진 삼포항은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비를 아끼면서 동시에 평화적인 무역항을 개설하여 왜구를 진정시키는 효과로 국가경영이라는 큰 관점에서 아주 경제적인 관리였던 셈이다.
한편 조선은 개국 초기 총통과 같은 화약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다량의 동철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삼포를 통한 무역이었다. 다시 말해 삼포를 통해 조선이 수입한 대표 물품이 구리였던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수출품은 그 당시 일본이 생산하지 못 했던 면화였으며 일본은 삼포무역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삼베, 모시, 명주 등이 가장 주요한 수출품이었으나 15세기 후반에는 대마도에서 목련만을 요구할 정도로 군수품과 민간의 의복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관복에 쓰이는 허리띠 모양의 관대와 활의 재료로 쓰이는 물소의 뿔을 남방의 유구라는 나라에서 조달할 수가 있었다. 질기고 탄력 있는 물소의 뿔이 아니면 제대로 된 활을 생산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현대의 궁 제작에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유구에는 가져온 품목은 소목, 후추, 주석, 향료와 동물로는 앵무, 공작, 물소, 물소뿔, 코뿔소 등이었다고 한다. 이런 남방의 특이한 물건이 국왕에게 바쳐진다는 것은 국왕의 권위를 세워주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세조 때와 성종 때 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들어왔으며 그 교류의 무대가 바로 삼포였다.
삼포무역의 규모는 점점 거대해져 갔다. 무역량을 비롯한 제반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세종 25년 삼포의 무역수준을 정한 계해약조가 만들어졌다. ‘대마도주에게 매년 쌀 200석 등을 곡물로 하사한다’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한다’ 등의 제약을 담은 이것은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고 삼포는 계속 팽창을 하면서 조선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이에 조선은 여러 가지 억제책을 통해 삼포를 진정한 국제무역항의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삼포는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을 일본과 유구에 팔면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구 사이의 중계무역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그 당시 불교문화가 잘 발달되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삼포에서 대장경을 사가기도 하였다. 이것은 삼포가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교류항으로도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삼포가 성장하고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한편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삼포 인근의 보평역은 현대의 이태원에 비할 데 없이 북적대던 곳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상인들은 서로의 물건을 사고 팔기도 했으며 심지어 동업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정을 이것을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왜인들 역시 갖가지 생활 지침을 만들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훈도시 차림으로 왜관 밖을 나가나 말 것, 조선인 앞에서 큰 소리 치지 말 것, 싸움을 할 때 상대를 때리지 말 것, 조선인이 참석하는 자리에는 최소한 국 2가지와 반찬 7가지를 준비할 것 등 왜인들은 조선인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삼포를 번창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당시 명나라는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고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멀리 배를 몰고 나가지 못 하게 하는 해금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조선으로 왜구들이 몰리게 되었고 그들은 무역량의 확대 등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무역을 열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효율적으로 이것을 통제하였다. 대마도에서 재포로 오는 뱃길에는 반드시 조선의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거제도를 지나야 했고 재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웅천성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염포와 부산포 역시 병영진과 수군진에 둘러싸여 있어 삼포는 내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동시에 군사적으로 통제가 잘 되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건들로 삼포는 안정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포무역을 통해 조선은 일본과 유구에 대해 우리가 상국이라는 자신감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외국의 대표가 삼포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조선의 국왕에게 인사를 하게 하였다. 이때 일본과 유구의 대표는 종3품의 자리에서, 그리고 대마도와 여진의 대표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종4품의 자리에서 국왕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이렇듯 조선은 각 국의 대표를 굳이 궁으로 불러들여 공물을 받고 또한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삼포무역을 조선이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자신감을 알리던 중요한 외교통상의 무대가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폐쇄하게 되는데 그것은 세종 때 30호에 불과하던 왜인의 수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347호 2500명으로 팽창하면서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거대해진 삼포는 조선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물품의 대가로 주던 면포가 너무 늘어나면서 국가재정의 위협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주변의 전답을 사들이면서 왜인들의 고리대금을 갚지 못 한 가난한 조선인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두 문화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로 말미암아 조정은 삼포왜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불만의 결국 중종 5년 삼포왜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많은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어가며 결국 빼앗겼던 웅천성을 탈환하고 왜란을 진압하였으나 이것은 곧 삼포의 폐쇄로 이어지고 대마도와의 단교 선언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한반도 최초의 재팬타운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은 다른 나라와의 활발한 교역 등을 통해 화총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며 발전해갔다. 그리고 이것은 임진왜란에서 우리 조선의 힘든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삼포왜란 이후 삼포항을 폐쇄하지 않고 다시 재정비하여 진정한 동아시아의 국제무역항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면 조선이 주도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동시에 동아시아가 균형 있게 성장하여 어쩌면 임진왜란과 같은 우리 민족의 아픔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 참고 >
KBS 역사스페설 ‘세종 때 조선에 재팬타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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