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정치문화 사법제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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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역참이 전국에 설치되어 교통의 안전이 보증되었으므로, 동서의 육상교통은 빈번해졌고 멀리 떨어진 지역간에도 교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또 항저우·촨저우 등을 출구로 하여 남해와 인도양을 통과하는 해상교통도 활발해졌다.
원거리교역의 주역을 담당한 사람은 색목인계의 오르타크 상인이었다. 오르타크란 궁정과 제왕(諸王)의 영리사업을 위탁받은 특정 상인조합을 말하는데 그 상인들은 고리대금을 업으로 삼고 지배계층과 결탁해서 징세의 청부도 맡았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이 통일되었기 때문에 국내교역도 한층 활발해져, 강남을 중심으로 여러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상업도시의 발흥이 촉진되었다. 강남의 쌀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대운하가 정비되었고,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해운도 시작되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동전을 거의 주조하지 않고 지폐만 통용하는, 다른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통화정책을 시행했다. 즉 원왕조 성립 초기인 중통 원년에는 은을 준비금으로 삼아 <중통원보교초>를 발행했고, 또 1287년에는 <지원통행보초>를 발행했는데, 지원초 1관을 중통초 5관으로 환산했다. 양초는 민간에서의 신용도가 높았으며, 비록 하락하긴 하였지만 원말까지 지폐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하지만 말기에는 이것이 남발되어, 교초 50관으로도 조 1말을 살 수 없을 정도의 악성인플레이션을 가져왔는데, 이는 원왕조가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몽골의 왕공 귀족은 처음에 한지로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봉지를 받았는데, 남송이 멸망한 후에는 강남의 비옥한 토지도 하사받았다. 더욱이 토지 소유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대지주·사원·도관 등의 강남에 있어서의 토지겸병은 송나라 때 이상으로 심했다. 한편 세조는 건국하자 곧 한지에 사제를 시행했다. 이것은, 전란으로 황폐화한 화베이(화북)의 농촌을 부흥시키고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설치한 자치조직이었다. 50호를 1사로 묶고, 사마다 농사에 밝은 연장자를 사장(社長)으로 임명함으로써 권농과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뒤에 강남에도 확대되었으나 점차 형식화되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2.문화
몽골의 지배는 중국의 전통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서의 교통이 빈번해진 결과 서방문화가 중국에 들어왔으며,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가 한인들 사이에도 보급되고 종래의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에다 가톨릭도 전래되었다. 몬테코르비노는 세조 때에 대도에 와서 처음으로 가톨릭교회를 세웠다. 몽골인 자신들은 라마교를 믿었고 이 때부터 라마교는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또 재래종교 중에서 도교에 있어서, 금대에 일어난 전진교는 화베이(화북)를 본거지로 했고, 전통적인 정일교는 화중을 본거지로 했으며, 불교는 선종이 번성했다. 이와는 반대로 유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냉담했다.
몽골군이 처음으로 화베이에 들어왔을 때, 일시적이긴 했으나 유생들이 일반백성과 구별없이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예전에는 사회적 지도자로서 존경받았던 그들의 지위는 땅에 떨어져서 당시에<관·이·승·도·의·공·엽·민·유·면>이라고 하여 유생은 겨우 거지보다 한 단계 위로 평가되었다.
한편, 유생과 사대부의 지위가 낮아짐으로써 고상한 사대부문화의 그늘에 가려서 표면에 나타나지 못했던 하층문화가 대두하여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과 예능, 특히 잡극이라고 불리는 희곡이 발달했다. 지은이들은 작가조합의 회원이거나 배우로, 대개가 하층지식인들이었다. 또 《서유기》 《수호전》 등 구어소설의 원형도 이 시대에 생겼다. 또한 강남이 처음으로 이민족의 지배 하에 놓였다는 사실은 이 지방의 사대부에게 큰 충격을 주어 정사초와 같이 원왕조를 증오하고 저항한 사람, 왕응린·마단림처럼 새 왕조를 섬기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한 사람도 있었다. 이때까지 정치가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학문을 연마해 왔던 사대부들은 과거제의 폐지로 정치를 떠나 시와 서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그 결과 쑤저우(소주) 등에서는 오로지 문학과 예술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문인>층이 생겨나, 명대(明代)에도 계승되어 자유분방한 시민문화가 꽃피었다. 동서교통이 활발해진 결과 많은 이슬람상인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중국을 찾아와 서방의 천문학과 역학·지리학·의학 등을 전했으며 그것을 흡수하여 수시력을 만든 곽수경과 같은 학자가 나타났다. 또 마르코폴로 등은 동방사정을 유럽에 전했는데, 그것이 지리상의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3. 사법제도
이민족이 중국에 들어와서 지배자가된 경우에 점차 중국의 높은 문화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나라는 중국을 통치함에 있어 몽골인들에게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지배자적 지위를 보장하는 체제를 만들었고 민족고유문화의 유지를 도모했다. 이것을 몽골지상주의라고 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민족별 신분제도인데, 몽골인·색목인(위구르인·이란인 등)·한인(거란인)·남인(옛 남송치하의 주민) 등 4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몽골인만이 정치적인 요직을 독점해 모든 특권을 향유했으며, 색목인은 몽골인의 능숙하지 못한 재정 등을 담당함으로써 역시 지배자의 반열에 끼어들었다. 수적으로는 월등히 많은 한인과 남인이 피지배자의 자리에 떨어져 정치의 중추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법률상으로도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중앙정부는 송대에 시작된 군주독재제도를 계승해 중서성(행정)·어사대(감찰·사법)·추밀원(군사)으로 구성하고 각 장관의 합의로 국무를 결정했다. 각 장관에는 대개 몽골인이 임명되었는데 몽골인 아닌 자가 재상이 된 경우는 원왕조를 통해서 불과 3명뿐이었다. 지방행정에서는 전통적인 주현제를 계승함과 동시에 주(州) 위에 노를 두었으며, 도시에는 특별히 시내행정을 관장하는 녹사사를 설치했다. 수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행정구역을 뜻하는 복리는 중서성 직할이었는데 그 밖의 지역에는 행중서성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중서성의 출장소로서 임시로 설치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 직속의 상설지방관청이 되었다. 줄여서 행성이라 했는데, 지금의 행정구획 성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허난(하남)·장베이(강북)·산시(섬서)·쓰촨(사천)·간쑤(감숙)·랴오양(요양)·장저(강절)·장시(강서)·후광(호광)·윈난(운남)·링베이(영북)의 10행성이 설치되어 각각 지방행정 전반에 걸쳐 광범한 권한을 가졌다. 본래 각 장관은 몽골인을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 노(路) 이하의 관청에는 다루가치라는 독특한 관직이 있었다. 이것은 단사관이라고도 번역되며 지방행정 전반에 대해서 결정권을 가지는 최고책임자이자 차관급 이하의 한인관료들을 감시하는 감찰관이기도 했다. 원왕조에서는 전통적인 관리등용시험인 과거를 폐지하고, 고급관리의 임용은 세습·은음·추천제 등 문벌주의에 의했다. 문벌이라 하더라도 귀족사회의 그것과는 달리 조정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느냐의 여부가 기준이 되었다. 이 밖에 관리가 되는 길은 서리(사무원)에서 승진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종래의 사대부적 교양을 버리고, 저급한 일이라고 경멸해 왔던 이학을 배워 서리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었기 때문에, 1314년 인종 때에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합격자의 수는 적었고 관제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백성은 직업에 따라 군(軍)·참(站)·장(匠)·민(民)을 비롯해 승(僧)·유(儒)·의(醫) 등의 각 호적에 등록되어, 직능에 따라 각종 의무가 주어졌다.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호 가운데 한인은 세량으로 속미를 바치고, 또 사역에 대신하는 과차로 사료와 포은을 바쳤다. 남송 멸망 후 세조는 과차를 강남에서도 시행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이 지역에서는 남송에 이어서 양세법이 시행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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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 공상철외 공저 다락원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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