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학의 시대 위진남북조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하안과 왕필은 ‘귀무’를 제창했고, 모든 존재, 즉 ‘유’는 ‘무’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무’를 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교도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이치’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향수와 곽상 등은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관점에 반대하여 만물은 ‘자생’하며 ‘독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도 명교와 자연은 일치하기 때문에 봉건질서는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배위는 <숭유론>을 지어 ‘귀무’ 사상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무에서 유가 만들어 질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봉건명교를 적극 옹호했다. 위진 현학과 현대 경학에서의 신학은 그 목적론이 같지는 않으나, 현상세계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을 탐구하기 위해 글을 지었다. 곽상은 자신이 추구한 장자의 근본원리에 따라서 <장자주>를 정리해서 주석을 하였는데, 그 해석을 통하여 계층적 신분질서를 천리로 인정한 명교자연론을 전개하였고, 고립하여 산재하는 각자는 경우의 변화에 무한히 응할 수 있는 ‘성분’이나 ‘위계’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득’한다고 하는 육조귀족제 사회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 명교와 자연의 논쟁
죽림 현학의 대표적 인물은 완적과 혜강이다. 완적과 혜강이 주로 활동하던 이 죽림 시기는 조위 정권과 사마씨 집단이 권력 쟁탈을 벌여서 사마씨 집단이 권력을 쟁취하는 위 진의 교체기에 해당된다. 사마씨 집단은 권력 찬탈의 과정에서 유학의 허위적인 도덕 질서를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집단의 무리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정책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자연’에 합치되는 이상적 ‘명교’와 현실적 ‘명교’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완적과 혜강도 초기에는 하안과 왕필의 정시 현학처럼 ‘자연’과 ‘명교’를 하나로 합치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완적은 ‘자연’에 근거한 정치와 교화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만약 위정자가 이상적 자연 질서에 순종할 수 있다면 만물도 저절로 교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혜강도 [성무애약론]에서 “엣날에 왕이 된 사람은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리고, 저 간이한 교화를 숭상하여 무위의 정치를 시행하였다. 군주는 위에서 고요하게 있고 신하는 아래에서 순종하여, 현묘한 교화가 소리 없이 소통되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태평하게 되었다고 하여, 자연 질서에 근거하여 도적 질서를 세울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위 진의 교체기라는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완적과 혜강은 ‘자연’과 ‘명교’의 합일적 이상이 현실 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의 ‘명교’ 질서가 ‘자연’의 이상에 부합되는 ‘명교’가 아니라 사마씨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에 부합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 질서와 ‘명교’ 질서가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빚을 수 있다는 인식은 이미 왕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왕필은 양지의 합일성에 대한 낙관론적 신념에 근거하여 그 모순적 관계를 어디까지나 위정자의 잘못된 통치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완적과 혜강은 현실 정치의 한계를 군주제도의 모순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완적은 도덕 질서가 왜곡과 변질되는 이유를 군주제의 폐단에서 찾고 있다. 즉 그는 자연 질서에 어긋나는 허위적인 도덕 질서가 군주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군주제를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적은 ”대게 군주가 없어도 믓 사물이 안정되고 신하가 없어도 온갖 일이 다스려진다“고 하여, 군주도 신하도 없던 태곳적 사회를 이상으로 동경한다. 혜강도 [태사잠]에서 ”옛날에는 천하를 위하였는데, 지금에는 한 사람의 몸만을 위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미워하고, 군주는 신하를 의심한다. 상사와 화란이 더욱 심하게 되었으니, 나라가 곧 이로 인하여 무너지게 되었다“고 하여, 군주의 개인적 사리사욕이 현실 사회의 국가 질서가 붕괴되는 근본 요인이 된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혜강은 군주가 자연 질서에 따라 무위의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백성이 자족하는 생활을 하던 태곳적 이상 세계를 주장한다. 이런 완적과 혜강의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은 당시의 위정자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는 허위의 도덕 질서가 생겨나기 이전의 자연 질서와 도덕 질서가 하나로 일치되었던 이상 세계의 원초적 화해를 강조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 도덕 질서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이상적 자연 세계를 강조하는 것이 단순히 이상적 도덕 질서의 정당성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완적과 혜강이 비판하고 있는 도덕 질서는 이미 당시 사마씨 정권에 의해서 외곡 되고 변질된 ‘명교’를 말한다. 따라서 완적과 혜강의 궁극적 의도는 결국 도덕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왜곡되고 변질된 현실적 도덕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자연 질서에 부합되는 새로운 도덕 질서를 창출하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즉 현실적 도덕 질서가 백성을 억압하는 도구적 통치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상적 자연 질서에 부합되는 이상적 사회 질서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려는 것이다.” 명교를 초월하여 자연에 내 맡긴다“는 혜강의 주장이 바로 그러한 사유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이상에 부합되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출하려는 것이다. 완적과 혜강이 현실의 허위적 도덕 질서에 반대하여 당시의 ”예교‘에 어긋나는 극단적 행위를 일삼는 것은, 현실 사회의 허구적 도덕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이상 세계의 자연적 행위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이분화 되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완적과 혜강은 인간의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충동과 갈등을 빚는 이중적 자기 분열의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왜곡된 사회 질서 속에서 현실적 자아를 긍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기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적과 혜강은 이런 자아의 이중적 자기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여 인간의 본성을 재규정함으로써, 이상적 인격 속에서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의 갈등과 충돌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완적과 혜강은 이상적인 자연 질서와 현실적인 도덕 질서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현실 사회의 모순에 직면하여 현실의 ’시비‘를 초월한 이상적 인격에서 이상과 현실의 통일적 조화를 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혜강과 완적의 이상은 당시 사회 현실과 관련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위 진 교체기의 군주제의 폐단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군주제를 허위적인 도덕 질서의 근본 원인으로 비판하고 사회 질서의 궁극적 존재 근거로 이상적 자연 질서를 설정하여,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합일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죽림 시대의 사람들이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의 주체적 역량을 통해 ’자연‘의 이상과 ’명교‘의 현실이 하나로 일치 될 수 있기를 갈망하던 시대적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언어는 진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 - 언의의 논쟁
구양건의 사상은 <언진의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240여자에 불과한 이 글을 통해 사물의 형태색깔 등 객관세계의 인간의 개념이나 언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고 보았다. 이 논문은 당시 현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 동진 시대에도 영향을 주었다.
불교와 유가의 쟁투 - 수 당
부처가 되는 길 - 이사(理事 : 원리와 현실), 심성(心性 : 본심) 논쟁
1) 유식종
당나라 현장과 그의 제자 규기가 창립했다. "모든 법은 오직 식이다"라는 주장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또 만법성상을 밝히는 것을 주된 요지로 삼아 법상종 또는 법상유식종이라고도 한다. 규기는 항상 장안의 자은사에서 머물렀으므로 자은대사라고 불렸는데 이 때문에 이 종파를 자은종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은 〈해심밀경〉·〈유가사지론〉·〈성유식론〉을 기본경전으로 한다. 주된 가르침은 유식설과 삼성설이다. 유식무경을 주장하여 안의 인식은 없는 것이 아니며 밖의 대상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일체의 현상은 모두 심식에서 연유하며, 특히 그 가운데 아뢰야식의 종자가 만들어낸 것으로 결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식종은 삼성설을 이용하여 전체적인 학설을 개괄했다. 즉 심식을 인연으로 하여 나타난 현상계가 의타기성이고, 현상계에 대해 분별·집착하여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변계소집성이며, 객관이 실재한다는 관념을 없애고 일체에 오직 식성이 있을 뿐임을 체득하면 원성실성에 도달한다. 유식종은 또한 불교논리학인 인명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규기 이후 혜소·지주가 이 종파의 학설을 널리 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오래지 않아 쇠퇴했다. 그러므로 유식종이 유행한 시기는 매우 짧다. 근대 중국학자인 숑스리는 유교와 불교사상을 융합하여 신유식론을 제시했으며 저서로 〈신유식론〉이 있다. 7세기 신라의 승려 원측은 당나라에서 현장으로부터 직접 유식학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학풍을 세웠으나, 규기의 자은파로부터 질시와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원측의 유식사상은 도증을 거쳐 태현에게 이어졌으며, 태현은 신라의 유식종인 법상종을 세웠다. 이후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유식학에 대한 연구가 계속 이어져 독립된 종파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조선초 선교양종으로 종파가 통합되면서 맥이 끊어졌다. 7세기 일본 승려 도소·지달은 당나라에 들어가 현장에게 유식을 배웠으며, 8세기 일본 승려 현방·지봉은 당나라에서 지주를 따라 공부하고 귀국한 후 남사와 북사의 갈래로 유식학을 전하여 일본의 유식종을 세웠다.
2) 천태종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수당 통치제도와 다른 나라에의 영향 율령체제 형성 균전제 조용조 세제의 확립
  • 시대 현종 때, 토지가 집적(集積)되어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되어 가는 현상이 두드 러지자 이에 유형원이 균전제를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수․당대의 조용조세제 *조(租);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을 징수, 용(庸); 사람에게 부과하여 부역을 하거나 그에 해당하는 물품을 징 수, 조(調)는 호(戶)마다 단위를 부여하여 토산품을 징수-조용조 조세의 원칙은 위진시대 이래 널리 시행되어 왔는데, 일반적으로 호(戶)를 단위로 한 과세방법이었

  • 위진 남북조 시대 사상 -현학과 명교
  • 위진 남북조 시대 사상 - 현학과 명교1.현학의 배경과 의미현학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한나라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선거제를 택하였다. 물론 추천 기준은 유학적 소양이었다. 그러나 집안끼리 서로 추천을 거듭하면서 명문 귀족이 문벌화하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정치경제문화를 모두 손에 넣은 명문 귀족들은 더 이상 벼슬을 얻기 위한 유가 공부에 집착

  • 위진남북조의 사상 조류
  • 위진남북조 하면 떠오르는 ‘청담淸談’과 ‘현학玄學’은 바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우선, 현학이란 위진魏晉 시대의 노장사상을 숭상하는 사상적 흐름이고 《노자老子》, 《장자莊子》, 《주역周易》의 삼현三玄을 중시하였는데, 여기서 ‘현玄’이란 용어는 《노자》 1장의 현묘지문(玄妙之門)에서 유래하였다. ‘현’은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하늘이자 허공이며 텅텅 빈 무無로 설명되었다. 또한 ‘현’은 천지나 만

  • 이웃종교와 선교 유교 Confucianism
  • 시대(漢唐時代)한당시대의 유학은 한나라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천년동안의 시기로 중세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한대에는 경학(經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 발달하였고,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노장의 현학(玄學) 현(玄)이란 노자(老子)에 나타나는 것으로 중국 도가(道家)의 학문을 일컫는 말로서 이것은 인식을 초월한 우주생성(宇宙生成)의 근원을 말하며 이것을 또한 도(道)라고도 한다. , 그리고 수

  • 도가사상 레포트
  • 시대와 전한시대부터 도교에 대한 내용은 이미 다른 학파의 저술 속에서 나타난다. 직접적인 인용과 분명한 모방이 자주 발견되며 〈도덕경〉과 〈장자〉로부터의 인용은 이후 모든 시대의 중국문학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문체와 내용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많다.신선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많은 시에서 신선과 불로초를 찾아다닌 경험을 직접 또는 은유적으로 쓰고 있으며 불로장생약을 지으려고 했던 사실을 묘사했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