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철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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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상’의 철학적 의미
‘가상(virtual)’이란 무엇인가? ‘가상’은 ‘현실(reality)’을 통해서 의미 규정이 가능하다. 우선, 가상은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를 쉽게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컴퓨터 게임을 살펴보면, 그 속의 세상은 아무리 기상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을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가상은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킨다. 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킨다. 예를 들어, 영토 개념이 그러하다. 영토는 지구 바깥을 나아가 직접 보는 것 말고는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알고 있고 여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인접국가로 일본, 중국, 러시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직접 경험하는 대신에 하나의 가상을 만들어서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그 가상이 바로 지도다. 유대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선조들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러나 유대인이 말하는 그 영토는 잠시 있었다가 사라졌다. 실재였다가 지금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주장을 경험할 대상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으며 남은 것은 영토 구획을 확신시켜주는 역사서이고, 이는 과거에 그러했는지를 단지 개연적으로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런데 영토를 확인해주는 가상의 이미지인 지도를 통해 유대인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일은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변형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지배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무엇인가?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사이버 공간(cyber space)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은 첫째, 물질적으로는 현실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컴퓨터 회로와 같은 극소 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둘째, 이는 또한 고도의 정신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 번째 의미에서의 사이버 공간은 물리적으로 보자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다른 어느 공간보다 넓다. 이러한 공간에서 인간은 또 다른 현실인 가상현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을 통해 나는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울 수도 있고, 시장이 되어 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고,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수도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극소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오히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보다 더 생생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흔히 이런 현상을 초실재(hypeeal)라고 한다. 이는 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기 때문에 실재를 넘어선 실재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가상현실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사이버 중독이라고 하며, 실제로 이 사이버 중독으로 인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가상현실 속에서 ‘가상’이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사이버 중독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가상현실에서 정체성 혼란이 올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지, 가상으로부터 왜곡된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이 점을 정확히 짚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시뮬라시옹』에서 현대인의 삶 자체가 가상 지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는 우리는 모든 것을 따져 묻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막연한 이미지, 즉 가상의 조작에 의해서 우리는 거짓을 진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정치가들은 선거 때가 되면 이미지 정치를 한다. 한나라당은 파란색, 민주당은 노란색을 사용해서 선거 홍보를 한다. 파란색은 평온하고 협력적이며 냉철한 느낌을 노란색은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실재가 아닌 가상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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