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교회사] 일본의 기리시단 수난사 및 한국 카톨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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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의 기리시단 수난사 및
한국 카톨릭과의 관계
내 용
1. 서 론
2. 일본의 ‘기리시단’ 수난사
3. 한국 카톨릭과의 관계
4. 결 론
1, 서 론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로 대표되는 카톨릭의 본격적 일본 선교의 개시 이후 바쿠후(幕府) 정권과 이어지는 협력과 갈등, 그리고 박해의 역사는 東아시아에로 제국주의와 카톨릭 선교의 진출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스페인, 포르투갈 중심의 카톨릭 국가와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의 집권자와 여러 다이묘(大名) 등의 연결고리에서,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合戰) 이후 에도 바쿠후(江戶幕府),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후의 박해 상황과 시마바라(島原)의 난으로 네덜란드 중심의 개신교 국가와의 접촉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과 쇄국정책 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정치와 종교’라는 연결 고리에서 일본의 카톨릭 수난의 전개를 고찰해 본다면, 향후 조선(朝鮮)에서 전개되는 카톨릭 수난의 내용과 유사성 및 차이점 등을 비교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한다. 徐正敏 교수는 한국 기독교사와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한국 기독교사는 그대로 정교(政敎) 관계사이다. 新舊敎를 막론하고,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수용된 이래, 정치적 상황과의 상호성이 게재되지 않은 채 전개된 바가 없다. 기독교회사 2천 년 어느 시대가 이러한 특성에서 자유로우랴마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기독교사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의미이다. 이른바 ‘韓國民族敎會史’니, ‘韓國民衆敎會史’니, 심지어 ‘韓國敎會福音運動史’마저 그것의 정치적 관계성을 떠나 기술되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조선후기, 한말, 일제하, 분단과 전쟁시기,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시기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한국교회의 정치적 관련성이 유보된 적이 없고, 한국정치와 사회 또한 기독교에 대한 현실적 기대와 응답을 지속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리스도’와 ‘가이사’가 한국 상황에서 구분되거나 유리되기 어려웠다.
강위조, 徐正敏 옮김, 『韓國 基督敎史와 政治』, (서울: 韓國基督敎歷史硏究所, 2005), p.5.(옮긴이 머리말 중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연결고리로 하는 조선과 일본 카톨릭의 연관성에 대한 검토 역시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져야 하겠다.
2. 일본(日本)의 ‘기리시단’ ‘기리시단’은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탸오’(Christao)가 원어 발음 그대로 일본어가 된 것이며, 원어 소리대로 ‘吉利支丹’, ‘切支丹’등으로 한자 표기되어 왔다. ‘크리스탸오’는 본래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 및 그리스도교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시 신자는 스스로를 기리시단이라 칭했고, 선교사도 ‘qirixitan이라고 기록했다. 그리스도교 전래 당시에는 ’機利紫旦, 貴理志端, 吉利支丹‘ 등의 한자가 사용되었는데, 금교령 이후에는 ’鬼利至端, 貴理死貪‘이라고도 표기되었다. 그러나 1680년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가 쇼군(將軍)직에 오르자, 그의 이름자인 ’吉‘자를 꺼려 ’切支丹‘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다.
고노이 다카시(吳野井 隆史), 李元淳 옮김, 『일본 그리스도교사』, (서울: 韓國敎會史,硏究所, 2008), pp.26~27.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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