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재심판결의 의의 및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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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재심판결의 의의 및 과제
- 목차 -
Ⅰ 들어가며
Ⅱ 인혁당 관련 사건의 개요
Ⅲ 진상규명 활동과 진실
Ⅳ 법원의 재심 판결과 배상 판결
Ⅴ 재심판결의 의의 및 과제
Ⅵ 나오며
Ⅰ 들어가며
1975년 4월 8일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치욕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이른바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북한의 지령으로 국가전복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상고를 기각해 각각의 형을 확정했고, 이에 대해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치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날 사형을 확정 받은 서도원 등 8명은 스무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전격적인 사형집행이 이루어진다. 이를 두고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극단적인 사례이자 사법권력이 행정권력에 아첨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사건의 진실이 은폐왜곡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정권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외국인 사제인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다 강제출국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실에 대한 요청을 끊이지 않고 ‘인혁당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이하 인혁당 대책위)를 구성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이후 민간정부가 들어서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가 설립된 후 과거청산 차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부분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진실위)를 통해 인혁당,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인혁당 관련 사건의 구체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유족들은 의문사위의 결정을 근거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하게 되고, 법원이 2007년 1월 23일 무죄판결을 내리게 되면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판결은 박정희 정권에서 발생한 공안사건들 가운데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첫 번째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고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의 개요와 문제점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함께 살펴보고, 의문사위와 국정원 진실위의 과거청산 과정에서 드러난 진상규명의 내용을 확인할 것이다. 이와 함께 법원의 재심판결 내용을 분석하고 이러한 판결의 의의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인혁당 관련 사건의 개요 ‘국정원 진실위,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언론발표문, 2005. 12. 7.’을 중심으로 참고했으며, 몇 가지 자료를 추가로 참고해 정리했다.
1. 인혁당 사건(1964년)
1) 시대적 배경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원대복귀를 약속한 이른바 ‘혁명공약’과는 달리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에 이른다. 이후 경제개발을 최선의 국정목표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에게는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고, ‘한일회담’에 사활을 걸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정권의 이해 때문에 졸속으로 처리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비판하면서 급기야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당시 박정희가 표방하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른 후 관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이를 체제전복 기도로 간주하고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담당판사가 영장청구를 기각하자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등 정국의 긴장감은 높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가면서 국민적 공감을 얻자 정부는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위기상황에서 학생운동의 배후로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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