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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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프로테스탄트 여성
어떤 여성을 프로테스탄트라고 할 수 있을까? 프로테스탄트란 16세기의 종교개혁 이래 로마 카톨릭교회 에서 분파한 각종 기독교회에 귀속한 사람들을 프로테스탄트(신교도)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1529년 4월 독일의 제국의회에서 루터계 종교개혁파의 제후와 여러 도시가 로마 카톨릭의 다수파 측의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해서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고 ‘항거([라틴어]protestatio ; 프로테스타티오)’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은 여성문제와 관련한 몇 가지 점 에서도 카톨릭 기본이념과 대립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처녀성이라든지 은둔 생활에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성실성’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은 결혼이라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역시 가부장 사회였기에 프로테스탄트 여성들도 그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만인 사제라는 종교적인 교의 또한 종교상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가장 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고 아내들이 전도 하고 신앙을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원칙은 그대로 관철되어왔다.
하지만 본래 만인 사제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평등하지만 성직자들의 임무나 직무는 구별해야 할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루터는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자기가 사제 또는 교황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무방하다 비록 모든 신자들이 그런 직책을 맡는 것이 적당하지는 않겠지만“이라고 말하면서 논의의 핵심이 성직자의 고유한 본질에서 단순한 기능적인 문제로 옮겨감에 따라 사회적인 신분 상승이나 신분 이동의 기회를 얻기도 하였지만 본래 성직자라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 존재하는 사회적인 신분 체계가 성직자 사회에 그대로 재현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은 이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평신도들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짐에 따라 여성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엘리트 여성 뿐만 아니라 여성 일반에 대한 교육 문제가 관심사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성교육에 관해선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앞서 갈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남녀의 사회적인 역할은 다르다는 통념이 사회에 깔려 있었다. 특히 성직을 포함한 일부 직책들은 여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남편을 돕는 일이라든지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부여함으로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했는데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은 독신 보다 결혼해서 부부를 이루는 것이 정서적으로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 각성 운동: 여성들을 위한 호기
19세기로 막 접어들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의 종교적 지위도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감리교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전통적이고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 이였다. 18세기 19세기의 영적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존 웨슬리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여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을 열거해 봐도 웨슬리의 견해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요인들에 의해 여성들에게 중요한 역할들을 맡기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의 위치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에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는 종파를 분리하거나 새로운 교파를 창시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개혁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대각성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어떤 환기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부흥운동 초기에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종교적 열광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여성들은 오늘날 non -Christian집안에서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처럼 집에서 핍박을 받았다. 이런 사태들 때문에 여성들은 아예 말을 하지 않고 부흥 집회를 가곤 했다. 부흥집회에서도 설교자들은 여성들에게 남편, 사회에 대해 복종하지 말 것을 종용하지 않았다. 다만 부흥 운동을 주도 하던 단체들은 ‘형제’ , ‘자매’를 동등하게 대하는 곳이 있었고 사회는 이런 조직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자신의 딸과 아내를 보내는 것을 경계 하였다. 부유층의 경우에도 여성이 남편들을 이끌고 가 집회에 참석하게 하였고 그 후에 변화된 남성들이 부흥운동에 참여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따라서 영적 대 각성 운동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남성들에게 영향력 또한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는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이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평신도들의 지위가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덕분이기도 했다. 부흥 운동은 기존 교회와 대립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신자들의 직위보단 신앙심이 얼마나 독실한가가 더 중요 했다. 그리하여 일부 여성들은 거의 목사직에 준하는 역할까지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특히 신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물론 부흥 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자중할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신대륙에서는 설교자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성들도 설교자로 나설 수밖에 없는 실정 이였다. 그리하여 18세기, 19세기에는 여성 순회설교자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최초의 흑인 여성 설교자들도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각자에게 정해진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고 경계선을 넘게 되면 언제나 위험이 따르게 되는데 여성들이 종교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곳에서는 늘 말썽과 분쟁이 따랐다. 19세기의 가정의 흔한 모습은 여성이 남성을 돕는 모습 이였고 마찬가지로 부흥 운동가들의 아내들 또한 부흥 집회의 준비를 위해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여성들의 역할은 부흥 집회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여성들의 역할은 집회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느냐, 그리고 집회가 끝난 뒤에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대부분 설교자들의 부인의 조직능력과 영적인 감화에 좌우 되었다.
목사 부인들
수많은 종파로 갈라져 있던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 목사 부인들이 했던 역할은 기본적으로 집안의 안주인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즉 목사 부인들 역시 남편의 사역에 뒷바라지 역할을 해야 했고 남편의 사역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어느 정도 부인의 자질에도 달려 있었다. 물론 목사의 부인들에게 직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도적인 어떠한 장치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교회의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라든지 교구의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 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든가 병자들을 돌보는 일등은 통상적으로 목사 부인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반 여성들이 갈 수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목사 부인들은 봉변을 당하거나 곤욕을 치루는 일은 없었다.
목사 주변에 있는 여성들 부인이나 딸 심지어 형편에 따라서는 하녀들까지도 여성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그때 통념 이였던 여성의 이미지 ‘게으르고 나약하고 허황된 생각을 하는 존재’ 들이라는 인식을 과감히 깨버리고 ‘정력적인’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서 다른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의 모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남성들의 눈에 성에 걸맞는 정숙함을 잃지 않고 흠 잡을 것 없는 도덕성을 갖고 있는 한 여성들도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여집사
중간 계급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심을 밝히고 자선 활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여집사’ 라는 직분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직분은 특히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경건파들이 열정적으로 사회 활동을 벌여 나간 끝에 맺어진 결실로 1832년 함부르크 시장의 딸 이였던 지페킹에 의해 창립된 ‘빈민과 병자를 돌보기 위한 부인회’가 출발점이 되었다. 여집사의 집과 같은 시설이 설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빈민들의 건강과 교육문제가 사회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어 가던 때와 맞물려 있었는데 카톨릭 교회는 수많은 수도회들을 통해 봉사 활동을 헌신적으로 할 신도들을 직접 통솔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새롭게 대두된 사회문제 빈민 구제 문제같은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자선단체들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해 나갔지만 카톨릭교회와 같은 조직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시 술처 박사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천국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인의 자비심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같은 메마른 모래투성이 땅에서 결코 자라날 수 없다”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배경 외에 여집사직이 제도화됨에 따라서 여성들은 굳이 목사직을 요구할 필요 없이 종교적인 실천에 매진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집사의 집이 만들어 질때에는 당연히 규정도 만들어졌고 여기에는 아무리 선행을 하여도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해서만’ 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가미가 되어서 여집사들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하여도 공적이 크게 인정 되는 것이 아니였고, 자신들의 구원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는 그 당시엔 카톨릭교회 수녀들과 여집사가 하는 일들이나 자선활동을 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점에서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 크게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적 사고에 따르면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서 뭔가 남다른 생활방식을 취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여집사들의 집단생활은 여러 면에서 프로테스탄트 이념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여집사들의 집이 생기면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 논란과 비판이 많았다. 여집사에 대한 비판은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었는데 19세기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서도 일부 프로테스탄트들은 서원에서 신비스러운 복장을 한 여집사들이 혹시라도 비밀리에 카톨릭을 신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따라서 여집사들은 언제 제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로 비추어졌지만 여집사들은 늘 변화 무쌍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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