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일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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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5 / 20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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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백범 일지’를 읽고
이 책을 물론 수행평가 때문에 읽게 되었지만 김구 선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게 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백범 일지를 읽게 되었다.
김구 선생은 항상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분이다. 선한 인상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으며, 글을 즐기신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라를 사라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며,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그 원한으로 명성화후를 죽인 일본인을 죽여 감옥에 가게 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사형선고를 받고 탈옥을 하였다. 탈옥을 성공하고 나서 잠시 동안 절에서 승려로 지냈다. 그리고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학교를 세워 힘쓰기도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중국에 임시 정부를 세운 것도 김구 선생이다. 그러다 52세에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셨고, 한인 애국단을 만들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이끄셨다. 이봉창 의사는 총으로 일본 천황을 쏘려다가 실패하고 순국하셨고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벌어지는 천황의 생일 기념식에 기자로 변장하고 참석해서 천왕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광복군을 만들어 일본과 제대로 계획도 세웠지만, 일본이 미국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아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더라면 며칠 뒤에 김구 선생의 한일 광복군이 나라를 되찾아 지금처럼 분단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8.15 이후 외세의 힘을 빌려 하게 된 통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자주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분단을 반대했던 김구 선생은 미국 신탁통치 반대를 하며 김일성에게 찾아가 회담을 했지만 이내 곧 좌절되고 말았다. 분단 된 이후 남한의 독재자로 불리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선거로 인해 북한 역시도 공산주의 집권층을 뽑기 위한 선거를 이어나갔고, 이를 본 김구 선생은 탄식을 하였다. 그러다 결국에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 1949년 만고 대역적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쏴 74세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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