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리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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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1947년 10월 26일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댐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신자인 아버지는 웨일스 이민 후손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 출신이며, 시카고 시내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다. 힐러리가 3살 때 가족은 시카고 교외의 파크리지로 이주했으며, 힐러리는 그 곳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성장하였다. 힐러리는 파크리지의 평범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성장했으며, 메인이스트고등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파크리지에서 힐러리는 그의 아버지나 파크리지의 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에 호감을 가졌으며, 나이가 아직 어려 선거권은 없었지만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보수주의자 대통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였다.
대학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힐러리는 1965년 매사추세츠 주의 사립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여기서 청년 공화당 단체에 잠시 몸담았으나 당시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 차이로 차츰 공화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1968년 여름, 공화당의 하원의원 밑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업무 보조를 했으나, 이를 계기로 힐러리의 마음은 더욱 공화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유진 매카시 후보를 심적으로 지지했다. 1968년 가을, 졸업반 학생으로 웰즐리 대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졸업식 때 대표 연설을 하였다. 힐러리는 이 때 상투적인 졸업 연설 대신 여성·흑인민권문제 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라이프 지에 소개되는 등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웰즐리 대학교 졸업 후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있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학회지 편집자, 아동학연구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1년 같은 예일 로스쿨 학생이던 아칸소 주 출신의 빌 클린턴과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차츰 친하게 지내면서 여행도 함께 다니고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다. 힐러리는 빌보다 1년 먼저 입학해서 1972년 졸업예정이었으나 빌의 졸업때까지 1년간 같이 지내기 위해 졸업을 1973년으로 미뤘다. 한편 힐러리는 1972년 여름방학 중 텍사스 주로 건나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조지 맥거번을 위한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선거운동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 맥거번은 텍사스 주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크게 패했다. 1973년 여름 예일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무박사(J.D.) 학위를 받았으며, 졸업 후에 심화연구를 위해 예일 어린이 연구 센터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어린이와 법에 대한 학술 논문을 1973년에 발표하였다.
초기 경력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를 희망하던 힐러리는 컬럼비아 특별구(워싱턴 D.C.)와 아칸소 주의 변호사 시험을 쳤는데,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는 낙방하고 아칸소 주에서는 합격하여 아칸소 주의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한편 아동 보호와 인종 문제에 관심을 가지던 그는, 졸업 후 명망있는 여성 흑인 변호사인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이 이끄는 어린이 보호기금((Childrens Defense Fund, CDF)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CDF에서 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연관된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났고,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었다. 빌 클린턴이 연방 하원의원 법제사법위원회의 탄핵 조사단에서 일할 젊은 법률가로 추천되었으나, 1974년 아칸소 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빌 클린턴은 여자친구인 힐러리를 추천했다. 이에 따라, 힐러리는 1974년 1월부터 법사위 탄핵 조사단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힐러리는 조사위원으로 일하면서 종종 바쁜 일과를 쪼개 아칸소 주로 내려가 빌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탄핵 조사위원으로 일하던 중, 1974년 8월 9일,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탄핵 조사위원으로서의 임무도 종료되었다. 한편, 아칸소 주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빌 클린턴은 힐러리를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추천해놓은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실업자가 된 힐러리는 빌 클린턴이 추천해놓은 교수 자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칸소 주 시절
탄핵조사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면서, 힐러리는 아칸소 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예일 로스쿨 학벌에 닉슨 탄핵조사위원회에서 일한 경력만으로도 힐러리는 뉴욕이나 워싱턴 D.C.의 일류 로펌에서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도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아칸소 주로 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힐러리는 아칸소 주로 향했고, 페이엇빌의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에서 1974년 가을 학기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힐러리는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에 들어갈 때까지 20년 가까이 아칸소 주에 거주하며 활발히 경력을 쌓게 된다.
힐러리가 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빌 클린턴은 11월에 치러지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빌 클린턴은 30세가 채 안된 미천한 경력으로도 나름대로 선전하며 근소한 차이로 선거에서 패했다.
그 이듬해 빌 클린턴도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복귀하였다. 빌과 힐러리는 함께 대학 교수로 일하며 계속 사랑을 키워 나가면서 마침내 1975년 10월 11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로댐 성씨를 계속 쓰기로 하였는데, 이는 당시 보수적인 남부지방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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