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영랑金永郞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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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영랑(金永郞)[1903~1950]
1. 김영랑의 생애와 활동
본명 김윤식. 전라남도 강진 출신이며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며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훗날 최고의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최승희와 교제하였지만 결혼에는 실패하고, 1년 뒤 루시아여고에 근무하고 있던 안귀련과 재혼하였다.
28세 때인 1930년 박용철의 주도로 우리 현대시문학사에 획기적인 순수 시동인지『시문학』이 발간되었다. 여기에는 영랑과 정지용, 이하윤 등이 참여하였는데 영랑의 경우,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문학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떠오른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영랑은 대한독립촉성회 단장을 맡았고, 1948년 민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 해 10월 중순에 여순반란사건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 사건의 만행을 <새벽의 처형장>을 통해 고발하였으며,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추천으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생은 625가 나던 해인 49세 때에 미처 피난을 못간 채 서울에 은신해 있다가 포탄의 파편을 맞고 9월 29일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시작활동은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문학』, 『조광』, 『인문평론』, 『백민』, 『조선일보』 등에 80여 편의 시와 역시 및 수필, 평문 등을 발표하였다.
2. 작가의 경향
1) 초기경향
영랑의 초기시라 하면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형태상으로 보았을 때 3음보, 4음보(2음보의 배수)의 민요 율격과 한시의 구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김봉군 외(2001), 『한국 현대 작가론』, 민지사. p.153.
시어의 조탁으로 일상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향토어의 사용으로 우리 시에 향토적 서정성과 운율감을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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