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일 1941년 9월 30일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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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 태 일(1941년 9월 30일 - 1999년 9월)
“시인은 그 시대의 증인이요, 그 민족의 증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생명력이 강해서 그 시대의 핵심을 노래하고 그 민족을 한없이 노래해도 싫증나지 않는 법이다. 민족은 시인의 근원이기에 그 민족이나 국가가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시인은 그 민족 그 국가를 구하기 위해 지체없이 뛰어든다. 이름하여 저항운동하고 독립운동인 것이다.”
-조태일,「시인의 삶과 민족」『고여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Ⅰ. 생애와 문학활동
조태일은 1941년 9월 30일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 1리 동리산 태안사에서 대처승인 조봉호와 모친 신정임 사이에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에게 태안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그의 이름자 태자가 태안사의 첫 자를 따서 그의 부친이 지어주었는데, 형제의 항렬인 기(基)자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독학으로 중앙불교학원까지 학업을 마치고 전남 곡성으로 낙향하여 대처승이 된 부친이었기에 조태일의 유년시절은 두세 가구가 외따로 묻혀 사는, 하늘도 안 보이는 울창한 숲 속에서 멧돼지, 노루, 여우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순수하고 평화로운 추억과 함께 현대사의 비극적인 체험이 교차하고 있다. 한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조태일은 어린 시절 남다른 비극적 체험을 겪게 된다. 조태일과 그의 가족은 1948년 여순사건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던 1948년 10월 19일 당시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제14연대 병사들이 4.3항쟁 이후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군의 명령을 어기고 우익계 장교 2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발발, 좌익이니 우익이니 사상적으로 얽히지 않은 무고한 희생자가 순천에서만 2천여 명에 이른 비극적인 사건.
이 터져 태안사 일대가 최대 격전지가 되자 광주로 피난하게 된다.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뛰쳐나와 광주로 피안 온 지 2년만에 625를 겪게 된다. 이런 와중에서 조태일은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어 광주에서 3번씩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다. 한편 625가 끝난 직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을 지킨 것은 조태일 혼자였다고 한다. 1959년 18세의 나이로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63년 경희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경희대 2학년 재학 당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 船舶」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게 된다. 1965년 첫 시집『아침 船舶』을 출간한다. 당시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조지훈의 심사평을 보면 “건실한 시상과 신선미”가 있다는 평과 함께 “파탄(破綻)없이 끌고 가는 조사(措辭)와 호흡”이 살아있다고 했다. 이렇듯 「아침 선박」은 조태일 시인의 40년 시세계를 여는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 1969년 월간 시전문지『詩人』을 창간하여 이후 1년여 동안 주재했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된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60년대 말 그는 한때 시전문지『시인』을 주재 발간했었다. 약 1년여 이상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렵 그는 밥벌이조차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었다. 어쩌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에게는 거의 커피 값마저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시인』지를 오직 의지 하나로 높은 수준의 시전문지로 이끌어 갔다.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도 정실에 흐르거나 적당히 편집하는 일이 없었다. 시인하면 흔히 세상살이에 약하고 멍청한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 풍토에서 참으로 드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경림,「조태일이라는 사나이」1980
불구하고 투철한 의지로 버티며 고집스럽게 매달린 『詩人』이 있었기에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 좋은 시인이 배출될 수 있었고, 이런 점은 한국 시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두 번째 시집『식칼論』을 간행한다. 삶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쓴『식칼論』은 시대적 삶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여기서 ‘식칼’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남과 공유하는 무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4년 11월 18일 뜻있는 문인들과 함께「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하고 간사직을 맡아 유신독재체제와 맞서 싸운다. 1975년 세 번째 시집『國土』를 간행했으나 긴급조치 9호로 판매금지 당한다. 국내에서는 판금 조치되었던 『國土』가 일본에서는 1978년에 리까쇼오보오(梨花書房)에서 한국현대시선 시리즈로 일역되어 출간된다.『國土』를 쓸 무렵의 조태일 시인의 시적 관심은 “목숨 부지하기가 참말로 부끄러워 괴로움에 온 마음과 온 몸을 조인 채 허우적거리면서 살아 온 5년 남짓한 소용돌이 속에서 썼던 연작시 48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실 참여 정신과 저항 정신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관심은 급속한 산업화의 폐단인 산업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의식하며 참된 인간정신을 찾으려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민족의 문단이라는 민족의 현실 인식,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반성과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1977년 양성우 시집『겨울공화국』발간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고은 시인과 함께 구속된다. 1979년 4월 한밤중에 자택 옥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독재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29일 만에 석방된다. 1980년 계엄해제를 촉구한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 7월「자유실천문인협의회」임시총회와 관련 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신경림, 구중서 등과 함께 구속되어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 받는다. 1980년 시론집 『고여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를 간행했으나 판매금지 당한다. “문학인이여, 한번 단 한번 만이라도 썩지 말아랏”하고 외치는 조태일의 절규는 현실적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어려운 시대 상황이라 하더라도 예술가의 양심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고독한 길을 묵묵히 가겠다는 자기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당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글을 당시로서는 판매금지라는 궁색한 방법으로 억압한 것이다. 1982년 항일민족시선집 『아아 내 나라』를 간행. 1983년 네 번째 시집 『가거도』를 간행한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부분 조태일이 1977년 8월, 30년 만에 고향을 다시 찾은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1985년 시선집 『연가』를 간행. 1987년 다섯 번째 시집 『자유가 시인더러』를 간행한다. 1989년 광주대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임명. 1991년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김현승 시정신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여섯 번째 시집『산속에서 꽃속에서』를 간행한다. 이때부터 조태일은 자연과의 교감은 더욱 깊어지고 시적 경향은 서정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이 시집 3부에 실려있는 「국토」연작시 65~80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국토’정신으로 표출된 현실 참여와 시적 저항의 몸짓을 멈춘 것은 아니다. 시선집 『다시 산화에게』가 간행. 1995년 일곱 번째 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1999년 여덟 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를 간행한다. 불꽃같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기라도 하듯 그의 마지막 시집은 생의 끝자리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 비장함이 감돈다. 조태일은 1999년 9월 7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간암으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다. 2001년 광주 너릿재 시비공원에 「풀꽃」시비가 건립되고, 2003년 9월 7일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Ⅱ. 조태일의 시세계 - ‘불꽃’의 시학에서 ‘풀꽃’의 시학으로
조태일은 민중적 생명력에 대한 일관된 긍정과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단절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낙관적이고 근원지향적인 시세계를 완성해간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생명에 대한 추구라는 일관성을 보여주었고, 민중적 삶을 직접적 소재로 삼은 데서 자연 사물로 시선을 돌리는 변모 양상을 보여주었다. 즉, 조태일의 시세계는 ‘불꽃’(격정, 현실)의 시학에서 ‘풀꽃’(관조, 자연, 사물)의 시학으로 옮겨간 여정을 매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초기 시 - 원초적 심상과 현실 전복적 사유 : 『아침 船舶』(1965),『식칼論』(1970)
1960년대에 그는 활달한 기백과 거친 음색으로 다량의 작품을 산출하여 『아침 船舶』과 『식칼論』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다. 1960년대 시단의 주류를 점했던 모더니즘 취향의 난해성이 일정 부분 침투하기는 했지만 그의 초기시편에서 그것은 창백한 애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혹은 기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1970년대 민중적 서정시의 한 원형을 1960년대에 예비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경복(2001), ‘생명의 힘, 생명의 역사 -조태일 시의 의미’, 창조적 민족문학을 위한 작가사회
유성호(2004), ‘조태일 시 연구-저항성과 천진성의 시학’, 청람어문학회
이동순(2005), ‘조태일 시 연구’, 단국대 교육대학원
이오봉(2004), ‘조태일 시의 변모과정 연구’,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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