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문체반정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정조의 문체반정
1. 정조(1776-1800)는 “보지 않은 서적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명말이래 중국의 학술과 문학에 정통하였다. 즉위전 <<浙江書目>>을 입수하여 체계적으로 북경의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즉위 후 <<四庫全書>>를 구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가 대신 <<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하였다. 현전하는 규장각의 중국서적의 많은 부분은 정조때 수입된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抄啓文臣을 선발하여 경전과 역사에 관한 강의를 주도하였다. 그가 남긴 <<홍재전서>>는 경학과 역사 문학에 대한 당대의 쟁점을 요령있게 파악하고 잇는 최고의 학자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당대에 유행한 신문체의 문제를 인식한 최초의 인문이기도 하다.
2. 정조 16년 글쓰기에 대한 권력의 검열 - 문체반정(문체를 순정한 상태로 복귀시킨다)
이 사건은 천주교의 전파가 촉발된 것인데, 왕은 천주교보다는 사대부의 문체에서 원인을 찾았다.
1784년(정조8)정조는 “명청이래 문장은 險怪하고 尖酸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라 하였다. 정조는 신문체의 유행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 통제는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1785년 秋曹적발사건(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 남인의 자제들이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고 의식을 거행하다가 형조(秋曹)의 禁吏에게 적발된 사건)은 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머물렀던 서학이 신앙으로 전환한 중요한 사건이다.
주자학을 대신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이 이질적 종교는 체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 사건을 축소하여 덮어버렸다. 곧 적발된 인물들은 남인들이었고, 이 시기 정조는 남인을 정권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남인을 치죄하면, 정조가 의지하고 있던 남인 정권의 축이 무너진다. 정조는 이점을 우려했다.
대신 서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문체반정의 서곡이 울린 셈이다. 정조는 이 사건이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하여 1786년 1787년에 중국서적을 수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1788년 8월 3일 정조는 左道의 혹세무민이 천주교만이 아니라는 점, 더욱이 중국에서 陸學, 王學, 佛道, 老道의 종류가 있었지만 금령을 설치한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천주교의 전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를 봉쇄했다.
하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진산군에 살던 천주교 신자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은 덮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진산사건은 문체에 대한 정조의 정책의 전환점이 된다. 1791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불러들여 접견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체반정이 시작된다. 정조는 문풍이 점점 비속해지고 있음과 科文에까지 패관소품의 문체가 침투하여 경전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문체 변화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중국서적이니 박종악에게 稗官小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라도 중국판은 절대로 수입하지 말 것, 귀국때 철저히 수색해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유포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다.
성균관 대사성 김방행에게도 “성균관의 시험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下考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고 지시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정조의 정치 레포트
  • 정조의 정치 1. 배경사림정치시대사림의 등장당쟁의 심화영조의 탕평책탕평론의 배경영조의 노력사도세자2. 정조의 사상과 학문정조의 탕평론규장각과 초계문신제 문체반정과 문묘종사 사건영남만인소 사건 외국 문물의 유입3. 정조의 개혁정치경제부문경제개혁 실천의 의지 왕안석 논쟁 신해통공 신해통공인사, 제도 부문의 개혁4.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의현륭원 조성화성의 건설화성의 건설정치가로서의 정조와 화성 건설의 정치적

  • 이옥의 이탈과 실험보고서
  • 문체의 위상과 탈중심적 글쓰기1) 문체반정의 전개와 이옥 문체의 위상당시 국왕 정조는 문체의 문제로 남공철,이상황,김조순,심상규 등을 지목하여 반성을 얻어내고 그 와중에 박지원의 가 문풍변질의 원흉으로 지적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바로 정조의 문체반정인데,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옥뿐이었다. 문체를 통한 첨예한 정치적 알력의 와중에 한미한 선비였던 이옥이 희생양으로 선택된 감도 있

  • 박지원 `열하일기` 문학 작품 연구
  • 문체다.『열하일기』가 완성되기도 전에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연암의 글을 베끼고 본받으려 했을 정도이다.『열하일기』는 엉뚱하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됐다. 중국에 다녀온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나가 비교적 여유로운 저술활동을 하던 중 규장각 문신인 남공철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 즉 정조가 당시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이른바 ‘문체반정’을 일으켰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는 소설식 문체인 ‘패사소품체’ 옛 사상이나 문체

  • 정조의 교육정책보고서
  • 정조는 속학의 만연으로 인한 폐단 가운데 문체의 변질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보았다. 이는 문풍을 세도와 밀접한 관계로 보는 그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정조는 문체란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문체를 바로 세우고서야 세도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치자의 입장에서 문체의 붕괴는 이념의 위기와도 같은 것으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하여 정학에 근원을 둔 문장을 쓰도록 하였던 것은 단순히 변질된 문체를 바로잡

  • [국문학] 연암 박지원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계급의식
  •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1. 문체반정이란?연암 시대 조선 지식인 사회의 주요 사건 중에 문체반정이 있다. 문체반정은 도(道)가 없는 신식 문체(文體)를 도(道)가 있는 옛 문체로 바꾸자는 운동이다. 조선 정조(正祖)는 고문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난 소품문 영남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소품문을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글자 그대로 분량이 짧은 글이다. 둘째, 감정에 호소하는 산문이요, 기존의 문체와는 다른 기발하고 새로운 문장을 시도하는 산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