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가즈오 히치카타 다츠미 보충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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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오노가즈오 . 히치카타 다츠미에 대한 보충 자료 )
히치가타 다츠미가 무용계에 나타난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 무용에 관한 어휘는 무[舞]이거나 용[踊]이거나 무용[舞踊]이었고 ,아니면 발레 나 스페니쉬댄스와 같은 외래어였다 .히치가타는 거기에 한 개의 형용사인 ‘ 암흙 ’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춤의 개념을 변혁시켰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 일본 무용계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걸쳐 암흑부란 말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어두움에서 나타나 각광을 받게된 신조어가 되었다. 이 암흑이라는 단어는 히치카다 다츠미가 처음 고안해낸 말이었는지 주변 사람의 발상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암흑 부토’ 한 문자는 히치가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히치가타 다츠미 자신이 암흑 무용파라고 칭한것은 1961년부터이고 1962년 이후부터는 정확하게 앙코쿠 부토라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956년에 발표된 실질적인 히치가카의 대뷰작인 ‘금지된색깔 ’을 발표하면서 암흑 부토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31세에 히치카타는 [금지된 색깔]의 작품으로 부정적인 반응과 함께 현대무용계와 불화를 일으켰으나, 실상 이러한 동기가 부토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전 프린트 작품설명 참조)
그 후, 오노 가즈오 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게 되었고, 미시마 유키오와 절친한 교우 관계를 갖게 되었다 . 전후 일본의 새로운 윤리 가치기준이 필요한 시기에 히치가타의 작품은 잇달아 관중의 흥분을 야기시켰다.
창작표현에 있어서의 실험의 시대가 도래했고 오노가즈오, 히치가타 타츠미와 같은 젊은 무용수들은 현대무용을 연구해서 창조라는 이데아의 자극을 받았다. 히치가타는 고향 아키다에서 동경으로 온 후 그의 신체와 사고에 어울리는 적절한 무용형태와 동작을 발견하기 위해 오랜 실험을 거쳐 마침내 일본인 신체에 적합한 춤을 창안해 낼 수있었다. 더불어 나약한 사람들, 죽은사람 ,도외시된 사람들의 욕망을 재현하는 작업을 통해 번영하는 일본 사회의 그늘진 곳을 폭로하고 공격했다. 그리하여 1960년경 서구의 모던댄스 ,발레에의 반발로 생긴 부토는 단순한 춤 운동 뿐 아닌 음악 미술 연극 등의 새로운 예술조류를 찾는 문화운동 속에서 중심위치를 확보하며 발전 되었다. 당시 일본의 신체조건이나 생활양식 , 기후 ,풍토 등에 뿌리를두고 거기에 현대성을 수용할 수있는 형식을 찾음으로써 부토의 시대가 도래된것이며, 일본인의 짧은 팔 다리 , 작은키, 그리고 휘어진다리는 당시 무용의 중심위치에 차지하고 있는 발레의 테크닉을 소화하기에 적합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히치가타 다츠미의 부토개념은 암흑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어로 당시 일본 경제 발전에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는 말이다 . 이는 일본의 서구 지향적 성향이 모든 사회, 문화, 경제적 병폐들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사회내 소외된 계층에 대한 생각이 깔려 있던 것이 부토 발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히치카타가 60년대에 했던 활동은 반 사회적인 색채가 강하고 기존의 여러 가지 제도에대한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 그리고 폭력의 이미지를 전면에서 보여주며,근 현대가 은폐하였던 영역으로의 하강을 시도하였다. 또한 섹스, 섹슈얼리티를 규제하고 있는 사회문화에 대해 무대표현이라는 미디어로 도전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해외공연은 이미 여러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부토의 해외진출을 결정적으로 만든 공연은 특히 1980년 5~6월에 있었던 오노 가즈오의 유럽공연이라고 할 수있다. 이것은 낭시 연극제 [Theatre Festival in Nany ]의 초청공연 이었는데, 오노는 [라 아르헨티나 송 ] [ Admiring La Argentina] 과 두작품을 공연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이치가와 미야비는 오노 가즈오의 부토가 유럽관객에게 충격을 안긴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일본 부토의 표현은 ‘내적 에너지의 증대에도 관계없이 표현이 작은 것’ 이다. 즉 부토를 표현하는 사람은 내적으로 발생하는 다이나믹한 마음의 움직임을 모두 자시의 육체에 품고 , 그로인해 괴로움을 겪는 모습 ,즉 고통을 수용하는 이미지를 상기 시키고 이싸고 말한다. 더욱이 이 고통의 수용은 죽음의 상념과 깊게 관여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며, 이를 부토라는 새로운 형식을 찾아 표현한 것이라 했다.
부토의 창시자인 히지카타가 기본적으로 관찰한 ‘자세로서의 부정성 ’을 지적했다. 그것은 기성 가치관, 미의식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원초적 존재를 뽑아내는 것, 그 정성스럽고 섬세한 작업에서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사람들은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히지가타와 오노가즈오가 서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던 부토의 특성이다. 실제로 오노가즈오는 나이 든 육체를 드러내었고, 히치카타 다츠미는 ‘부토란 결사적으로 우뚝 선 신체다’ 라고 했다.
부토 , 히지카타 다츠미 부토에서 그의 특수한 기법의 일부가 확립된 시기를 1970년대 전반으로 보고있다. 그이유는 1972년 상연된 [사계절을 위한 27간의 밤 ] 이라는 연속작품을 상연할 때, 히지카타 다츠미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일정 정도 공유 할 수 있는 안무 기법상의 언어들이 정리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즉, 히지카타 타츠미의 부토의 움직임이 어느정도 객관적인 기법으로 제 3자에게 지시할 수 있게 된 시기는 바로 이때, 1970년대 전반 인것이다. 이 시기는 동시에 부토를 독특한 표현 스타일로서 특정지을 수 있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더욱이 부토 예술가들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히지카타가 1970년대에 무대연출로 선택한 방식, 자신의 육체를 규명하는 풍토성, 민족성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해서 히치카타의 부토작품은 그의 고향인 동북지방 특유의 표현으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확실히 중심을 낮게 유지한 상태의 움직임은 하반신의 표현을 풍부하게 했고 일본인 특유의 체형을 살린 부토의 모습은 일본 동북 지역 풍토에 서려있는 민족성을 주장함과 함께 부토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보여지게 되었다.
한편 히치카타 타츠미와 비슷한 시기에 부토를 지탱한 사람이 바로 오노 가즈오다 . 히치카타 타츠미보다 20년 이상 연장자였더 그는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흐름을 익힌 댄서 출신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히치카타 타츠미와 오노가즈오는 1950 년대부터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맺으며 공동으로 여러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게 되며 오노 가즈오는 히치카타 타츠미 대신 자신의 아들인 오노 요시토와 함께 작품을 창작했다.
1986년 세상을 떠난 히치카타 타츠미와 달리 오노가즈오는 현재100세의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 부토가이다. 살아있는 것과 부토를 하는 것이 완전히 같은 무게로 체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오노 가즈오는 살아있는 한 춤을 추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관련 히치카타 타츠미는 말년에 [쇠약체]라는 말로 부토를 설명했는데, 이것은 부토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평소 우리가 무의식 속에서 배척하고 있는 네거티브한 신체의 자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은 늙어가는 신체이며 불치의 병을 가진 신체이며, 움직이려고 해도 어딘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없는 신체라는 뜻이다.
1987~2007년으로 히지카타 다쯔미의 사망 이후 오노가즈오, 산카이주크 무용단과 다이라쿠다칸 무용단은 즉흥적표현 , 신비한 상징적 표현 ,에로틱한 표현을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스타일을 시도한다. 현재의 부토를 있게 했던 히치카타 타츠미가 1986년 세상을 뜬 후로는 더욱 구심점을 읽은 뒤 핵분열을 일으키며 다양한 길을 걷고 있다. 히치카타 타츠미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던 말을 들었던 아사카와 요코[오노가즈의 아들 ]는 스승의 암흑부토를 계속 정제하는 한편 전자장치를 부토에 도입하는 등 여러시도를 선보였다. 그리고 마로 아카지가 이끄는 다이라쿠다칸은 현재 부토 단체 가운데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는데 도쿄와 해외에서 스펙타클한 작품을 주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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