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끄 루소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8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루소의 생애
장자끄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남.
1722년 그의 나이 10세 때, 가정의 불화로 제네바 근교의 랑베르세 목사 댁에 맡겨짐.
13세에 도제 봉공의 길에 들어선 그는 세상의 냉혹함을 알게 되고 16세에는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게 됨.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기도 하고 급사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사이비 승려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몸소 체험함.
1731년 10월, 루소는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샹베리의 와랑 부인(1699~1762)을 만나게 됨.
1740년 그의 나이 28세 때 와랑 부인의 곁을 떠나 리용의 마블리 가의 가정교사가 됨.
1742년 당시 30세였던 그는 <음악 신기보법>을 작곡하여 살롱에 출입하며 디드로, 달랑베르, 구리무 등을 알게 됨.
1750년 <학문예술론>이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 모집에서 당선됨.
1755년 역시 디종 아카데미 현상논문에 당선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불평등의 원인은 사유재산의 소유에 있다며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통렬하게 비판하였고, 디드로가 편집을 맡은 [백과전서]에 기고했던 <정치 경제론>(1755년)에서는 일반 의지에 기초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1761년에는 <신에로이즈>
1762년에는 <사회계약론>, <에밀>등을 저술하여 프랑스 뿐만아니라 전 유럽의 사상계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1762년 6월 프랑스정부는 <에밀>을 위험한 사상이라고 하여 분서하고 에밀을 체포하려고 하자 스위스의 이페르톤, 프러시아령 모치에로, 비엔느 호의 비에루 섬으로 도망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섬에서도 퇴거 명령을 받음.
1766년 1월 흄의 도움으로 영국에 가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방랑의 수난 생활을 겪으면서 <코르시카 헌법 초안>(1965), <폴란드 통치론>(1772) 등의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