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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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애국 행위가 합일된 사실이 아주 많았다. 즉 나라를 사랑하는 행동이 신앙적으로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애국 행위가 신앙의 한 당위로 생각 된 것이다. 구한말에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되었을 때, 기독교인들도 국왕과 나라에 충성을 표하고서 애국과 구국 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기 위한 역사적 고찰을 하길 원한다.
우리 조는 을미사변이 일어날 당시 그리고 그 이후 일제침략시대를 배경으로,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운동 그리고 교회의 항일 운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발표를 통해 을미사변의 역사적 사실 중 모호한 부분들을 준비한 자료를 중심으로 나누길 원한다. 그리고 한말 일제 침략기 일제와 선교사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부록에서 다루었다.
1. 을미사변과 선교사들
1) 을미사변
1895년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제는 한국을 완전히 식민화시키고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허왕된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외 정책 수행을 위해 소위 ‘삼인(三刃)’이라는 음모를 결행하려 했는데, 하나는 러시아 황태자를 암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중국 정권대신을 처치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이 민 왕후라 판단하고, 왕후를 제거할 뜻을 구체화시켰다. 일제는 마침내 민 왕후를 침전에서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이 사건을 을미년에 저질어진 것이어서 ‘을미(乙未)사변’이라 한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는 궁중에서 자주 만나게 된 왕후의 모습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284p.
릴리어스의 글을 보면 민 왕후는 범상한 여인이 아니고, 한 시대를 뒤흔들 만한 인물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군대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 장교를 청빙하여 병사 2개 대대를 교련하였다. 이것을 훈련대라 불렀으며 모두 8백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로 하여금 궁성을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궁성에는 일인들과 친일분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역사학자들마다 훈련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다. 훈련대는 조선군대를 근대화 시켜준다는 명목아래 민비 시해 사건이 일어나가 4~5년 전에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군대이다. 일본은 조선 침략 시에 세력 확보를 꾀하고 그러한 목적에 따라 훈련대을 조정 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바로 전날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훈련대를 해산 시키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때 40여명의 훈련대를 배치시키고 훈련대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려했다.
일제의 이등(伊藤) 내각은 간교한 육군 중장 미우라를 행동책에 임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드디어 그의 명령에 의해 일본 순인들과 낭인들로 구성된 암살단들이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황도와 호신용 총을 소지하고 고문관, 순사 등 60여 명이 완비 제거 뜻을 품고 있던 대원군의 사주를 받고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 장군 휘하의 궁정 수비대를 몰아내고 “야수처럼”궁 안으로 쳐들어왔다. 한 일본인은 고종이 거처하는 침전까지 들이닥쳐 방 안에서 왕의 신변을 행하여 육혈포를 발사하고 어전에서 궁녀를 구타하고 이리저리 끌어당기면서 위협하였다. 이 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그 방안에 있다가 부상을 입고 간신히 신음소리를 내며 포복하여 추녀 끝으로 나갔으나 일본인들이 쫓아가서 어전에서 찔러 죽였다. 왕태자는 또한 다른 곳에서 붙잡혀 두 발을 잡힌 채 끌려갔는데 관과 신발이 벗겨져 망가졌다. 칼을 들이대고 왕후의 처소를 물었으나 다행히 상처를 받지는 않고 급히 고종의 처소로 달려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폭도들은 세자빈을 머리채를 잡아 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왕비의 위치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자 죽어 있는 군인들의 시체 곁에 내팽게쳐 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자객들은 왕후가 머무르고 있던 건청궁의 각 방을 찾아 헤메다가 조금 깊숙한 침전에 있던 왕후를 끌어내어 칼로 몇 번을 내리쳐 현장에서 시해했고 다른 궁녀 셋도 함께 찔러 죽였다. 285p.
이때 모든 광경을 목도한 외국인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사바틴이었다. 이 사건은 이들 목격자들에 의해 외부에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대외정책 보관소에 1700년~1900년도 사이에 외교문서가 있다. 이 외교문서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외교문서를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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