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근대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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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경제사회 성립 이전의 일본은 ‘봉건사회’였다. 서유럽에서는 8~9세기에 성립되었던 봉건사회는 일본의 경우에는 고대국가 형성기로부터 봉건사회가 성립될 때까지 (이 시대를 전국시대로 봄) 약 1000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오랫동안 정치적 틀 속에는 ‘고대국가’적 요소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고대 국가의 요소를 떨쳐버리고 봉건적 지배의 틀이 설정되기까지는 고대적 틀로는 전부 커버할 수 없는 현실 사회와의 괴리 때문에 타협과 항쟁이 반복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일시적인 안정을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볼 수 없었고, 15~16세기에는 무정부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더욱이 그 사이에, 일정 지역에서는 경제사회의 형성이 진행되어 무정부 상태를 수습한 새로운 정치권력은 동시에 이 경제사회의 형성까지 파악할 수 있는 성격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서유럽에서의 봉건사회 형성 과정과 일본의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경제활동이 가장 쇠락했던 상황을 전제로 하여 봉건사회가 형성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편으로는 고대 국가적 틀이 오랫동안 남아있는 가운데, 지방은 어찌됐건, 전국적인 정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오다정권, 도요토미정권, 도쿠가와 정권은 그러한 틀 속에서 경제사회의 존재와 그 대응을 고려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서유럽과 일본은 같은 코스라 하더라도, 각각의 역사적 경험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국가의 토지제도는 ‘율령제’ 하에서 이른바 토지공유제가 실시되었었다. 토지로부터 수익을 얻는 모든 농민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령에 의해 정해진 수입만으로는 중앙귀족층들이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토지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율령 상 최고 권위를 가진 천황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천황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황을 옹립하는 귀족세력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귀족들에 의한 토지사유가 생겨나면서 장원이 성립하게 되었다. 장원영주는 일종의 기생충과 같은 지대생활자였고, 농민의 상태나 장원의 생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장원제와 율령제는 별도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전국시대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기까지 약 900년에 걸쳐 일본의 정치지배 틀이 되었다.
11~12세기의 장원제 전성기에는 율령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붕괴되고 장원의 권력은 점차 커지게 되었다. 율령제의 권위가 후퇴하게 되면 이를 대신할 또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더 이상 율령이라는 법의 힘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힘으로서 무력에 의존하는 세력이었다. 이 무력을 조직한 세력에 의해 하나의 정치권력이 탄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가마쿠라 막부였다. 일각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을 ‘봉건’제도의 성립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봉건제도가 토지 급부를 매개로 하는 주군과 가신의 충성관계를 주축으로 했다는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가마쿠라 정권의 등장을 봉건시대의 성립과 직결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이후, 이 같은 틀을 이용하는 세력으로서 무로마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또 율령정권의 정치력 약화와 함께 지방의 재지토호층이 진출하게 되자, 장원을 둘러싼 사회 각 세력 간의 갈등은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가마쿠라 무로마치의 양 막부권력은 이 시스템을 폐기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시스템 자체는 존속하였다. 결국, 시스템의 폐기는 앞서 말했듯이 전국기의 무정부 상태를 거쳐 율령제와 장원제를 동시에 폐지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등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 진다.
장원제 하의 경제에서는, 영주층이 고대국가가 갖고 있던 연공징수권을 계승한 형태로 농민들로부터 수취한 현물연공을 직접 소비했기 때문에, 시장의 성립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농민의 생산목적 역시 자급과 연공이라는 강제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어 생산에 대한 적극적인 움직임도 없었고 기술개선도 없었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영주층은 농업생산과 농민 상태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산의 개선과 생산량 증대 같은 시도도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2) 경제사회의 형성과정
일본에서 경제사회의 형성은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기나이 평야지대에서 개시되어, 17세기 중반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큰 지역차를 경험하게 된다. 통일 정권 성립 이전에 관해서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사정이 동일하였기 때문에 이 둘의 조합에 의해 이 시기의 지역구조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 결과가 경제사회의 형성으로 이어지게 된 최초의 변화는 장원제 내부에서 발생했다. 장원연공의 대전납화(=금납화) 가 그것이다. 이는 이미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보인 현상이지만, 본격화된 것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였다. 원래 생산물로 바쳤던 연공이 화폐로 변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이 시기 생산물 형태의 연공 운송이 무척 곤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적인 물자운송에 꼭 필요한 율령정부의 행정력이 결정적으로 저하되었고, 무가세력의 장원침략에 의해 점차 장원영주는 연공 획득에 필요한 조건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연공량 그 자체도 물론 감소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도시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장원영주들이 도시를 버리고 지방으로 도망가거나 생활수준을 낮추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남은 수단은 보다 용이한 운송방법으로 연공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 선택이 바로 화폐였다.
대전납화는 많은 변화를 사회 각층에 주었고 서서히 발생하였다. 대전납화가 실시된다고 해도 연공의 수취 자체가 무척곤란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영주층의 생활도 궁핍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토의 주민 가운데는 장원영주와 그 기생계급 외에 일상생활의 필요품을 취급하는 상인과 수공업자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마치슈’(자치적으로 집단생활을 했던 상인과 수공업자)의 형성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화폐유통과 판매를 위한 생산이 물결처럼 도시 주변으로 확산되어 나가자 농촌과 농업생산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이전의 국한된 생산목적에 판매라는 요소가 추가됨으로써, 생산을 양적 혹은 기술적으로 억압하고 있던 조건이 완화되었다. 농민은 어떻게든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잉여분을 판매하여 화폐를 얻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소농자립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주에게는 예속노동력을 이용하는 직접경영보다 노예들에게 경영책임을 부과해서 노예의 가족노동력을 이용하고 집약경영을 실현하여 생산량 증대로 소작료를 취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상황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장원연공의 대전납화와 소농경영의 일반화와 더불어 무역도시나 시장촌 등 오로지 경제적 기능만 담당하는 새로운 유형의 도시들도 성립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나이 평야부에 경제사회가 성립하게 하였다. 영주지배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주민의 자치조직이 발달했고 장원제나 율령제에서 벗어난 전국 다이묘(=영주) 의 봉건적 영주지배가 성립하여 영주 측에 의한 생산량 증대 시책이 취해지게 되었다.
2) 경제사회의 성립 - 막부 말기의 경제와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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