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바 라쿠니 요시의 전원도시 전인교육을 둘러싼 활동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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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오바라 쿠니요시의 교육사상은 ‘전인교육론’으로 불리지만 그 특징은 그가 집필한 것만을 정밀 조사하는 일만으로 충분히 파악될 수 없을 것이다. 본장에서는 오바라의 ‘전인교육론’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는 ‘전원도시’ 다마가와학원의 특징에 주목함으로써 그의 교육사상을 ‘전원도시’ 구축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한다. 오바라에 의한 ‘전원도시’의 공동체 지향은 ‘전인교육론’이 말한 바와 일치한다. 그리고 ‘전원도시’의 형성과정은 오바라의 생각인 ‘노작교육’의 실천이자 광의의 ‘전인교육’과 겹쳐진다. 오바라의 ‘전인교육론’이 경전화되어 많은 지지자를 얻은 것은 그의 교육론이 공간적 현실로 구체화되고 존속해왔다는 사실에 따른 점이 크지 않을까? 오바라의 활동과 교육사상의 순환은 일본에서 ‘신교육’ 이야기를 낳고 스스로를 그 가운데에 위치지음으로써 교육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349
시작하며: ‘신교육’의 공간구성이라는 시점
일본의 ‘신교육’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인 오바라 쿠니요시(1887-1977)라는 이름은 우선 8대교육주장(1921년)에서 그의 강연제목이기도 했던 ‘전인교육론’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프뢰벨 등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인간의 교육Menschenerziehung이라는 한 마디에 간단히 어떤 무한히 깊은 의미’(오바라, 1921: 338)를 느껴 “‘인간의 본성’, ‘본연의 성’에 근거한 교육”(오바라 1921, 338)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각오를 보이고 진선미성건(健)부(富)를 표방하는 ‘여섯 면의 교육’을 이상으로 내걸어 그것을 ‘전인교육’으로 불렀다.
오바라에 의한 교육의 특징은 그가 쓴 것만을 정밀 조사하는 것으로는 어쩌면 충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오바라의 조카이자 교육자로서 그의 교육에 주목한 坂二夫가 정확히 지적한 것으로 ‘관념이 아닌 사실에 기반하여, 이념이 아닌 실천에 의해 분명해지는 지점에 오바라의 전인교육의 특징이 존재했다(坂, 1976: 298)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坂은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인교육의 이상은 쇼와4년 오바라가 창설한 다마가와 기숙의 교육에서 확대되는 동시에 급격히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거기서는 종래 인간의 전체적이고 조화로운 교양의 육성으로 등장했던 전인교육이 강한 노작적 색채를 띠고 지행합일의 세계로의 도전이 시도되고 있다.”(坂 1976: 298) 그에 따르면 오바라의 ‘전인교육’은 다마가와학원에서 노작교육의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다마가와 학원에서 노작교육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는 공간적 특징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동학원의 설립이 ‘전원도시’의 건설과 한 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350
후에 상세히 논하겠지만 오바라는 자신의 교육이상을 실천하고자 ‘교사가 경영하는 전원도시’를 형성하는 가운데 광대한 캠퍼스를 가진 학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파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대담한 행동은 동시대의 ‘신교육’ 관계들에게조차 다른 류로 아니 보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라의 ‘전원도시’ 건설은 교육에서 통상의 ‘이론/실천’ 관계에서 파악되는 크기를 초월한 것이기에 그 교육학적 의의에 관해 여태까지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는 오바라의 공간실천이 한층 커다란 역동성을 띠었다고 생각되는 다마가와 학원 설립으로부터 5년간의 시기(1929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시기)를 주된 고찰 대상으로 삼는다. 당시 다마가와 확원에 관한 여러 사료 중에서도 가장 많은 손이 간 것은 이데아 학원 및 다마가와 학원 출판부가 간행한 잡지 『이데아』(1923~1929), 『학원일기』(1929.6.~1932.2.), 『학원일기노작교육연구』(1932.3.~1933.12.)이다. 거기에 오바라를 포함한 교사들, 아동 및 학생들, 또 학원 관계자들에 의해 ‘교사가 경영하는 전원도시’에 대한 묘사와 그 변화에 관한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중요한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다마가와 대학 50년사』(1980) 등의 기념지가 그런 일차사료를 보완한다.
오바라의 ‘전원도시’를 고찰하면서 건축도시계획사의 연구성과(酒井 1987, 高見澤 2009) 및 다마가와 학원 주변의 지역지(다마가와 학원 마을 지역사 편집위원회 1990, 다마가와학원마을회 2009)도 시야에 두고 파악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 분야들에서 이미 다마가와 학원 주변의 공간에 관한 검토가 축적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오바라의 교육사상에 관해 부차적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한 편으로 교육학의 영역에서 오바라 연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도시를 포함한 공간 구성 문제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건축도시계획사 연구의 축적을 참조해가면서 그것을 교육학연구에 접목하는 가운데 ‘전인교육’을 재빨리 파악하고 싶다는 오바라 교육을 이해하는 입구가 축적된다고 생각한다. 본 장에서는 당장 이상의 같은 견해를 가지고 오바라의 ‘전원도시’에 접속해보고자 한다.#351
2. ‘교사가 경영하는 전원도시’: 일본의 ‘전원도시’ 체계에서 다마가와 학원의 위치
오바라 쿠니요시는 1887년4월8일 가고시마현 가와베군 서남방향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통신기술양성소에 들어가 가고시마현 내 대공전신국에 근무하였으나 교육의 길을 자각하고 가고시마현 사범학교(1905년 입학) 및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1909년 입학)에서 배웠다. 1913년부터는 가가와현 사범학교 교유로 교편을 잡고 1915년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여 학문상의 연찬을 쌓았다. 1918년에 동교를 졸업한 후 오바라는 히로시마고등사범부속 소학교에 발령받아 이사(교무주임)가 된다. 약 1년 뒤, 1919년 12월부터 오사다신의 추천에 의해 澤柳政太郞이 교장을 맡은 세이조소학교에 주사로 임명되었다. 1926년, 7년제 세이조고등학교장이 되었으나 1929년 다마가와학원을 창설하고 몸소 양교의 교장을 겸직한 후 1933년부터 다마가와학원의 경영과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다마가와학원이 개교한 것은 1929년4월1일이었다. 동학원을 설립하고자 세이조학원에서 자금조달의 경험을 갖게 되고, 택지분양을 통한 수입을 동학원 건설비로 썼다. 동년 6월에 간행된 『학원일지』 제1호에는 ‘분양지 20여 만 평’을 판매할 것을 목적으로 ‘다마가와학원 토지부’에 의해 ‘고원의 학원도시’라는 타이틀이 붙은 광고가 내걸렸다.
‘이상적인 꿈을 담은 모판, 진정한 교육의 도장인 다마가와학원의 건설비를 얻고자 하며 교사가 경영하는 전원도시입니다’(『학원일기』 1929(1): 표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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