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세계사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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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책을 읽다가 가장 감명깊었던 나라는 유럽이었다. 로마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은 강력한 황제 권력과 크리스트교를 결합시켜 비교적 안정된 사회로 발전 하였고, 서유럽 지역에서는 건강하면서도 소박한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가 만나 섞이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 되어있을때 서로마는 망하고 동로마가 비잔티움 제국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아누스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고, 교회를 직접 지배하여 제국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었다. 이 때 나타나게 된것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후에는 비잔티움제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슬람세력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인데 결국은 비잔티움 제국이 승리를 하고 10세기 경에는 다시 황금기를 맞게 되어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동,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명망한후 혼돈을 겪었지만, 프랑크왕국과 로마 교회가 협력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있었다. 그리고 다른 게르만 국가들과는 달리 로마 교회의 정통교리(카톨릭교)를 받아들였다. 서로마의 황제 카롤루스 대제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북부를 손에 넣은 서유럽 최고의 정복자 였다. 그리고 교황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없애고 제국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래서 교황을 카롤루스대제에게 서로마황제가 새롭게 탄생하였다고 선언하고 카롤루스 아우구스투르 라고 하였다. 서유럽은 노르만, 바이팅으로 불렸던 이들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때에 봉건제도가 성립되었다. 이후 교황의 세력이 황제보다 강해지자 1077년 카노사 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의 용서를 구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가 있었다.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이라고한다. 이후 교회의 쇠퇴가 시작되었는데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죽은 뒤의 세계에서 받게 될 형벌을 면제해 준다는 면벌부를 내리기도 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2세는 셀주크 투르크 족을 성지 예루살렘에서 몰아 내자고 호소하였고 십자군 정쟁이 시작되었다.
그 뒤 200여 년간 서유럽 인들은 일곱차례에 걸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 전쟁은 결국 서유럽의 패배로 끝났고, 교황과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이 국왕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또 문화와 경제적으로 앞서 있던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세계와 접촉하게 되면서 서유럽인들의 시야가 넓어 졌고, 상업과 도시의 발전에도 큰 자극이 되었다.
이 책을 고3때 읽고 다시 읽어 보면서 유럽의 역사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십자군전쟁이 일어난 원인과 결과에 대해 알 수있게 되어 좋았다. 유럽의 역사를 보게되면 교황과 황제의 세력다툼에 의해서 역사가 전개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세력이 커져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이 세력이 크지 않았다면 사람들을 모아 전쟁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비잔티움의 문화와 경제를 이슬람세계와 접촉시키면서 다른나라로도 비잔티움의 문화가 퍼질수 있어서 좋았고 또 서유럽인들의 시야가 넓어 졌다는 점에서 전쟁이라는 것이 나쁜 영향만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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