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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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에 대하여
모든 윤리사상가들의 사고를 올바르게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체계적인 것이며 방대한 사고의 연속에서 나온 결정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텍스트로 사용한 애린턴의 서양윤리학사(西洋倫理學史)는알기 쉽고 간결하게 쓰여진 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또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특히 필자의 생각은 여러 사상가들 중에서 특정한 원리로 윤리적 근간을 형성하는 독창적 학자보다는 총체적 사고로 방대한 저술활동을 한 학자들에 대해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고 판단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꾸준하고 정력적인 저술활동으로 유명한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신학대전(神學大全)과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등을 교과서적 체계적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등을 비롯하여 당시 금기시 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과 프로클로스, 보에티우스등의 저작에 대한 주해들과 신학과 철학에 대한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논한 소논집등이 있다. 그에겐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며, 천사적 박사, 또는 공동의 박사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애링턴의 저서, 서양윤리학사에서도 설명되어 있듯이 아퀴나스는 기적을 행하였다는 등의 사실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사상과 가르침 때문에 성자로 모셔진 최초의 인물로 추앙 받는다.
애링턴의 서양윤리학사를 읽으면서 이해되기 어렵거나 혹 오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부분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에 대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법 사상을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특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퀴나스의 사상은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아퀴나스는 맹목적인 믿음의 강요가 아닌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을 양립시켰다.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철학과 신학의 양립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섭리를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기독교적인 인격신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절대적 인격신과의 접목을 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독창적 천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철학과 신학을 양립시킬 수 있다고 논증하는 것 자체가 철학, 또는 신학 둘 중 하나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힘들거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철학으로 신의 섭리의 일부를 추측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만으로 신의 섭리를 전부 알 수 없다. 이렇게 충분하지 않은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을 통해야 한다고 아퀴나스는 설명한다. 그렇지만 아퀴나스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도 자연적 질서를 파악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로버트 L. 애링턴, 『서양윤리학사』, 김성호 옮김, 서광사, 1998, p. 232.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이 건전한 것이며 그것이 기독교 윤리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윤리적 탐구를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명백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최고선은 결국 인간 자신의 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완전성은 인간이 신과 접촉하고 인간을 위한 신의 계획을 완성함으로써 더욱 높은 수준으로 현존하게 될 때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선의 최종목적은 신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다. “우리의 궁극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곧 신이다. 신은 무한한 선이므로 오직 신만이 우리의 의지를 넘칠 만큼 가득 채울 수 있다.” 위의 책, p. 233.
또한 인간은 창조된 세계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어떤 속성 또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적절한 삶은 이성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성은 윤리적 원리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러한 윤리적 원리들은 신이 우리의 삶을 선에 인도하기 위해서 제시했다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목적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신에게로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인 윤리적 원리들을 파악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이성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이성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원리들을 자연법이라 하며, 이는 신의 영원한 법칙이 인간의 본성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보았는데, 이는 애링턴의 서양윤리학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애링턴의 서양윤리학사에는 자연법과 구별되는 법들이 명확하지 않으며 얼버무리듯이 나타나고 있다. 서양윤리학사의 본문에는 자연법(自然法)과 구분되는 형태로 시민법(市民法)이 나온다. 시민법은 다시 인간법(人間法) 또는 실정법(實定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설명되어있다. 또한 이것만이 유일한 법이 아니며 이와는 별도로 신의 법이 존재한다고 서양윤리학사에서 말하고 있다. 신의 법은 신의 이성을 표현하는 규칙들이며 그 자체로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섭리(攝理)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쉽게 쓰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하나의 의미가 다르며 그것이 정의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혼란을 줄 수 있으며 오해를 일으킬 여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즉 신의 섭리(攝理)와 신의 이성(理性)은 다른 것인지, 그것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자연법인데, 그것은 신의 법과 다른 것인지, 그리고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영원법과 인정법(人定法)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애링턴의 서양윤리학사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하거나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법의 개념이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문을 지나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자연법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핵심사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신학과 별개로 이성이 작용하는 철학을 성립 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법은 네가지 종류로써 존재한다. 영원법과 자연법, 그리고 시민법, 인간법, 실정법이라고 불리는 인정법,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신의 법이 있다.그 중 신의 법칙(法則)을 반영하는 영원법(永遠法)을 통해 자연법과 구별되는 특징을 파악하여 자연법 범위의 명확성을 파악 할 수 있다. 영원의 예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신 뿐이므로 영원법과 같은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에 있어서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도, 신에 의해서 알려지고, 미리 질서가 정해져 있는 한에 있어서는 신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로마서 제4장 제17절에 「하나님은 죽은 者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유로 신의 법의 영원한 이념은 신에 의해서 예지(豫知)된 사물(事物)의 통치(統治)에 질서(秩序)가 정(定)해지는 한(限)에 있어서 영원법의 본질(本質)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법은 목적을 향한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목적을 향한 질서는 영원적일 수 없으며 영원적인 것은 궁극의 목적 뿐이므로 어떠한 법도 영원적일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은 능동(能動)과 수동(受動)적 의미로 나눈다고 할 때, 위의 정의는 능동적 법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수동적 의미의 법은 그 자체가 목적에 질서가 정해지는 의미에서는 이를 함축(含蓄)하고 있지 않다. 즉 앞에서 언급한 능동적 법의 의미를 수동적 의미의 법은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법은 무언가의 다른 목적으로 질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은 공동체를 통치하는 수장(首長), 지배자(支配者)가 발(發)하는 바의 실천이성(實踐理性)의 명령이다. 세계가 신적섭리(神的攝理: divina providentia)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을 인정(認定)한다면, 우주세계의 전공동체가 신적이념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전체의 지배자인 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물의 통치이념, 그 자체는 법의 본질을 가진다. 신적이념에 있어서 사물의 파악은 시간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 영원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법칙은 영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사물의 완정성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보편적 완전한 자(universaliter perfectus)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은 사물을 출산(出産)하는 제 1원인이므로 하나님 안에는 만물의 모든 완전성이 우월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아무것도 더 이상 서술하지 못하는 존재」, 「더 이상의 어떠한 서술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다른 것들은 사람들, 개들, 구름들이지만 신은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의 이념은 영원법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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