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해방 후 편(19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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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해방 후 편(1945-53)』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 홍 구 옮김
< 목 차 >
Ⅰ.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Ⅱ. 강독 소감
Ⅲ. 연구 성과 및 한계
Ⅳ. 문제 제기
Ⅰ.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식민지 한반도에 있어서 상당히 갑작스러운 사건 중에 하나였다. 다시 말해, 충분한 독립의 준비 없이 조선인들이 식민지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대부분 긍정적인 것들 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당장의 치안 안정과 통치를 위임한 세력들의 정치적 성향은 지나치게 한쪽(공산주의 세력)으로 치우쳐 있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식민지를 경험하고 해방된 많은 국가들, 그런 유사한 조건에서도 흔히 발생하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출범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송진우를 위시한 온건세력이 세운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흥미 있는 것은 평양에서는 건준이 초창기에 온건파의 수중에 남아 있었던 반면, 서울의 건준은 급속히 좌익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대부분 여운형의 지도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특징은 p312-313에 소개된 건준의 인원 구성을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나마 자정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주의자로서 건준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의, 조직의 좌익적 경향을 우려한 사임은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건준의 좌익적 경향은 많은 사건들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고 할 수 있다. 45년 9월 6일에 실시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이 탄생되었다.
인공에서는 그나마 표면상으로는 우익적 인사(이승만-주석,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들이 다수 안배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로 대표되는 좌익은 건준을 그들의 매개물로 만들려 했음이 틀림없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좌익 활동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 우익 인사들에 비해 좌익혁명가들은 투쟁의 영웅으로 인식되어 공개적인 동경을 받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해방된 조선인들에게는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의 이념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소련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확실하게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미 점령군이 9월 9일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국의 정부로써 어떤 한 개의 당이나 단체를 승인할 의사가 조금도 없음을 명백히 했다. 따라서 인공과 점령군 당국 사이에 반목이 싹트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부 수준에서 위원장, 부위원장 자리들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9월 11일 박헌영파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해방일보』(기관지)를 통해 강령을 발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공이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반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중앙은 물리적으로 서울에 위치하였으나, 실질적이고 궁극적인 권위의 중심은 평양, 즉 모스크바에 있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정책결정이 소련 권위의 평양과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북조선분국이 창설되었다. 이때, 김일성의 공식적인 등장은 평양에서 10월 14일에 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는 열성적인 청년 공산당원들에 의해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의 마음을 끄는 데 유리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남과 북의 정치적 상황은 사뭇 달랐다. 남쪽에서는 여전히 친일 잔존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미군정과 함께 엉성한 통역정치가 난무하였다. 반면 북쪽에서는 공산주의 지지 세력에 의해 토지정리 및 분배가 이루어졌다.
1945년 후반기 6개월은 향후 수십 년간의 남한 정치의 기본 방향을 정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5년 10월 10일 발표된 아놀드 소장의 성명에서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하였다. ‘38도 이남의 조선 땅에는 오직 하나의 군 정부가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다른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 한반도의 갈등은 처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1945년 겨울부터 미군정을 포함한 남한의 모든 정치세력은 합작에 힘을 쏟았다. 이런 상황이 1년 가까이 지속되었지만, 우익과 좌익은 결국 완전히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나뉘어 졌다. 공산당 세력은 처음부터 이승만과 노선을 달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45년 10월 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 창설식에 참가한 것 등을 통해 그러한 노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은 독촉이 친일 및 민족 반역 세력을 배제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사실상의 결별을 하게 된다. 당시 우익은 민족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어떤 한 사람도 독립정부 수립에 배제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신탁통치)는 내부의 상당한 동요를 가져왔다. 모스크바 협정의 소식이 한국에 전해졌을 때 즉각적인 반응은 거의 보편적으로 신탁통치 반대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불과 3일이 지난 시점에서 공산주의 세력들은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반대로 바꾸게 된다. 결정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들은 해방 후 잠시 동안 장악해온 중앙무대에서의 축출을 의미하였다. 또한 양 진영 사이의 증오로 가득한 정치적 분위기는 폭력과 테러로 인해 극에 달하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합작의 노력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탁통치 문제는 우익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좌, 우 합작의 노력은 쉽게 성과를 낼 수 없었다. 46년 10월 4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여운형과 김규식의 이름으로 발표된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해서도 양측은 상호 비방하며 수용을 거부하였다. 일련의 불화는 여운형에게 있어 괴로움과 환멸을 주어 급기야 12월 4일에는 정치활동에서의 은퇴까지 선언하게 된다.
남한에서 공산당의 활동은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그를 비판, 견제하는 세력도 존재하였다. 공산주의 세력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던 외부에서의 상황과는 다르게 내부에서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내부적 문제들이 고조될 때인 6월에 박헌영은 38도선을 넘어가 북한에서 5주간 머물렀다. 이 기간 중 평양에서는 박헌영과 소련 당국 간에 모든 문제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합작 노력에 반대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을 뿐 아니라, 그의 장기부재로 용기를 얻었던 당내의 반대파도 닥치는 대로 물리쳤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공산당이(소련 혹은 북한) 3년 내에 가능하면 평화적으로 그러나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남한을 점령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시 한 번 한국전쟁이 북한과 소련에 상당한 시일을 두고 계회된 남침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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