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서평 - 북한 공산주의의 배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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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서평
1. 내용 요약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궤를 함께하며 시작된 우리나라의 공산주의 운동은 결국 분단의 역사를 만들었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한에서는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이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스칼라피노이정식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와 소련 후견 하의 북한 공산주의를 설명하고, 한국전쟁 시기의 북한을 다룸으로써 이후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공고해지는 과정의 배경과 한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에 관해 다루고 있다.
191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이후 1945년 ‘주어진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극도의 혼란 속에 남한에서는 미군정기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국 당국에 의한 통치가 시작된 가운데 남과 북의 공산주의는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해방 후의 공산주의 운동은 서울에 본거지를 두었고 박헌영을 지도자로 삼고 전개되었지만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으니 그것은 ‘미국’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소련과 첨예한 대립 관계였던 미국이 남한에서 군정을 시작한 이상 남한의 공산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제약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당시 혁신적인 좌익 민족주의자이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건준은 해방 후 정치무대에서 이니셔티브를 쥐었으며, 이후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재건파 박헌영을 중심으로 당 재건을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서울이 조공 중앙본부였고 박헌영은 전국적 지도자로 받아들지는 등 해방 직후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중앙은 서울에 있었지만 궁극적인 권위의 중심은 평양이었다는 점이다. 1945년 10월 13일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5도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에서는 한국의 특수성을 이유로 북조선분국 창설이 결정되었고 김일성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남한에서의 공산당 세력에 관한 다양한 통계와 자료를 살펴보면 남한에서의 당과 외곽단체가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나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직사업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조직사업을 통해 1945년 말 공산당이 지도하는 좌익은 전위조직 사업에서 중간파나 우익을 능가하였는데 그 수는 많았지만 참여 열기가 높지는 않았다. 한편 1945년 후반기 인공을 중심으로 남한 전 지역에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우익과 중간파 지도자들이 인공에 참가하지 않으면서 인공과 미군정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45년 11월 말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인공이 정부라는 주장을 철회하고 정당의 지위를 받아들이라는 군정측 요구를 수락할 것인지가 주요 문제였다. 박헌영은 한국인이 군정에 완전히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결국 인공은 ‘발전적 해소’ 전술 이 전술은 소련의 정책을 따른 것일 뿐 아니라 당시 공산당과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전술이었으며 이탈한 여운형을 연합에 끌어들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서울로 귀국하는 등 제반 상황들을 고려한 전술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전술이었다.
을 통해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1945년 겨울부터 미군정을 포함한 남한의 모든 정치세력은 합작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좌익과 우익의 적대적 진영으로 완전히 나뉘어졌다. 좌파는 새로운 민족통일전선 수립에 총력을 경주하면서 이승만이 창설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우익은 좌우익의 모든 세력이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좌익은 친일분자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국내 정치상황은 더욱 복잡해져갔다. 그런 가운데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5년간 신탁통치를 부과한다는 결정이 전해지자 좌익은 처음에는 탁치에 반대하였으나 러시아의 지시로 탁치 찬성으로 입장을 돌변하면서 대중적 지지도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합작은 계속 추진되었으나 좌익의 강한 반대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이 시기 좌익은 박헌영이 남조선노동당 결성을 결정하고 여운형은 사로당을 결성하는 등 내부적으로도 분열을 겪고 있었다. 1496년 10월 여운형은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으나 좌우익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고 결국 합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남한 공산당 내부도 파벌과 투쟁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미군정과 남한 공산당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은 남북을 망라하는 공산당 재편을 결정하였고, 박헌영은 좌익정당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좌익통합 계획을 추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출범시켰다.
한편 공산당과 미군정간의 충돌은 점차 강해졌다. 공산당은 통일전선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려 하였으며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소련의 새로운 정책이 박헌영을 거쳐 조공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났고 폭력적 저항을 하는 등 공산당의 좌경화는 극심해졌다. 공산당측의 폭력을 수반한 총파업 등으로 미군정과 공산주의 관계는 미소관계의 악화를 반영하여 적대적이었고 한국전쟁 직전까지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었다. 특히 남한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1948년 제주 43 폭동 등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남한의 공산주의는 미국과 한국인들의 연합세력, 그리고 그 자신의 전술적, 전략적 과오로 인해 패배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고 1945년 12월 이후 우익은 민족주의 문제를 들고 나와 이를 미국과 공산당 양자를 다 물리치는 정치적 무기로 동원할 수 있었다. 결국 해방 후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적대적 환경에서 활동해야 했고 이로 인해 공산당은 대중과 유리되면서 극단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소련 후견 하의 북한 공산주의는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무대를 주도한 것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조만식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한 직후 북한의 실질적 지배자는 소련군이었으며 평남 건준을 재편한 인민정치위원회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였다. 소련군은 조직 내에서 비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소련계 한국인, 갑산파와 결탁하여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초순 등장하였는데 그는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소련에 의해 선택되어진 지도자였다. 소련은 파벌투쟁으로 점철된 국내파 공산주의자를 불신하였고 연안파는 중공의 노선을 따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소련은 1945년 10월 말경 5도행정국을 창설하였는데 이 시기 조선의용군이 귀국하여 세력기반을 구축하면서 1945년 말경 한국공산주의 운동 내에는 소련-갑산파, 국내파, 연안파간의 치열한 삼각 투쟁이 벌어졌다. 김일성 일파는 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당내 문제점을 지적하고 민족 통일을 위한 장기적인 당 정책 등 당면 과업을 제시하고 가결됨으로써 국내파에 타격을 주는 한편 당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신탁통치안에 대해 민족주의자와 격렬한 싸움에 돌입하였고 중도파 및 우익의 반탁의사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구실이 되어 통일의 기회마저 막았다. 이 시기 평양의 소련군정 당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조만식을 제거하는 강경책을 사용함으로써 비공산계 민족주의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1946년 2월 북조선 대표 확대협의회에서 김일성은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친일파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를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 일체의 권력이 공산당 수중에 들어가면서 민주개혁이 실시되어 1946년 3월에서 8월 사이 소련 감독 하에 주요 법령이 공포, 최초의 주요법령은 토지 개혁과 관련된 것으로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제 1조는 농업제도가 경자유전 원칙을 취할 것임을, 제2조와 제3조는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할 토지의 범주를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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