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으로 보는 고구려의 건국과 대외관계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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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주몽으로 보는 고구려의 건국과
대외관계의 허와 실
Ⅰ. 서론
저희 조에서는 주몽에서 나타난 고구려 건국과 고구려와 다른 부족 및 국가와의 관계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해 역사적 진실과 드라마와의 차이점을 통해 우리의 역사 진실을 알아보고 토의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이번 발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내용을 살펴본 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잘못된 점을 알아보고 그 사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더 알 수 있을지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Ⅱ. 본론
ⅰ. 고구려 건국사에서의 허와 실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이 한나라와 부여의 전쟁 후 궁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 때 대소가 실권을 잡게 되고, 대소가 한나라의 요구에 의해 고조선의 유민들을 한나라로 노예로 보내려 하자, 그에 반발한 주몽이 유민들을 모아 다물군을 조직하여 부여와 한나라에 대항하면서 주몽의 고구려 건국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모습은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부여국은 하나가 아니라 북부여, 동부여로 나뉘어 있었으며,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었다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몽은 동부여로 이동하는데, 왕위계승에 패하고 남쪽으로 자신의 세력인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함께 떠난다. 남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재사, 무골, 묵거를 만나는 등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으나 그 세력은 미약했을 것이다. 주몽이 도착한 졸본 비류수(현재의 환인 혼강)부근에는 이미 부여에서 먼저 내려온 다른 세력들이 많았고 토착세력 또한 다수 존재했다고 한다. 그 세력 중 송양이 이끈 세력이 가장 컸으며, 주몽의 세력과 연계하여 그 지역 세력 통합에 큰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유리왕이 다스리던 계루부가 고구려 연맹 안에서 송양왕이 다스리던 송양국을 제치고 고구려 연맹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계루부가 고구려의 으뜸이 되는 부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의 일이기에 건국사와는 큰 상관이 없겠으나, 고구려 초기의 중심 세력이었던 송양의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유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로 인해 고구려의 국가를 발전시키는 명분, 정치적 힘의 근원을 얻게 되고 또한 고조선을 이어간다는 명분과 그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 실리적 요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나라가 설치한 사군현을 축출할 명분을 가지고 만주지역과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확립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 건국에서 중요한 점은 드라마에서처럼, 오로지 철제무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구려 초기 건국시에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족들과 소국들을 통합하는 것이 그들의 우선과제였으며 고구려는 그것을 충실히 따라 부족과 소국들을 자신들의 세력에 편입시켜 세력 확장에 힘을 썼다. 이를 바탕으로 한나라의 현도군을 축출한 후, 국가 기반을 충실히 다질 수 있었으며 이후 만주지방을 호령한 고구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더 알아보는 이야기 ]
*주몽의 남하 전에도 고구려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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