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를 통한 세종의 민생 안정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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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를 통한 세종의 민생 안정 도모>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게 농업이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으므로 국가적으로 이를 장려하고 안정적인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이루어진 결실 중 하나가 측우기의 발명이었으며, 이를 통해 우량의 측정은 물론 강우에 대한 통계적인 작업도 가능해졌다. 자연현상에 대해 기기를 사용하여 수량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우리나라에서 15세기에 실시되었다는 사실은 농업기상학의 설립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비교할 때, 중국이 한정된 지역에만 국한하여 부정기적으로 강우를 측정한 데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독창적인 측정방법을 사용하여 수백 년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던 사실은 그 과학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측우기는 세계기상학사에서 측기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고, 이를 이용해 계측한 1770년 이후 서울의 강우량에 관한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실은 세계 최장기록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의 측우기에 관한 자료는 실물보다는 문헌기록에 잘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23년 08월 18일 (임오) / 호조에서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라는 기사와 “세종24년 05월 08일 (정묘) /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라는 기사 등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 알 수 있다. 먼저 세종 23년(1441년) 8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1441년 이전에는 강우량을 측정할 때, 땅에 스며든 물의 양을 측정하거나 웅덩이에 고인 물을 재어서 보고하였고, 건조함과 습함의 정도에 따라 측정치에 오차가 많았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 만들어진 최초의 우량계는 높이 42.5cm, 지름 17cm의 철 원통형이었으며, 돌로 만든 대 위에 설치하여 원통 안에 찬 물의 깊이를 재는 방식이었다고 기술되어있다. 우량계는 다음해인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에 보강된다. 우량계의 이름을 측우기라 하였으며, 그 크기를 전년의 것에 비하여 작게 하여 깊이 32cm, 지름 15cm로 하였다. 그리고 측정에 사용된 자가 주척이었고, 척ㆍ촌ㆍ분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하도록 조치하였던 사실도 주목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 ·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측정된 우량은 감사를 통하여 중앙의 호조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되어있어 전국적인 강우량의 측정이 실시되었다. 이처럼 15세기 이루어진 측우 정책은 임진왜란 등의 변고로 주춤하다가 영조 때에 재정비되었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 46년(1770년) 5월 1일에 구제(舊制)에 따라 측우기를 다시 만들어 팔도에 설치하게 되었으며, 그 때에는 청동으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관상감이나 각 지방에 있던 많은 측우기는 일제시대와 6·25 때 없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계기상학에서 우리나라 측우기가 차지하는 과학사적 위치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측우기는 금영측우기 한 점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형태는 원통형이며 입술 부분 한곳과 몸통 부분 두 곳에 마디가 있다. 그리고 몸통의 마디 사이에는 "금영측우기 고 일척오촌 경 칠촌 도광정유제 중 십일근" 이라는 명문이 6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이 기록으로 이 측우기가 충청도 감영인 금영에 설치되었으며, 조선 헌종 3년(1837년)에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측우기는 과거에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었는데, 1915년경 인천측후소에 있던 기상학자 와다(和田)가 주척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해 가 일본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뒤 1971년 3월 측우기가 반환되었는데, 이 때 주척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금영측우기는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하는 높이 1.73m의 정사각형 대석이 남아 있다. 현재 금영측우기를 받치고 있는 대석은 원래 대구에 있던 것으로 제 짝이 아니다. 대석에 "측우대건륭경인오월조" 라고 새겨져 있어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측우기가 한 점 뿐이라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러 문헌을 통해 세계최초로 우량측정기계를 발명한 사실과 더불어 측우기를 슬기롭게 이용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측우기는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설치되어 전국적인 관측망을 갖추었었고, 이를 서울에 보고하여 통계를 내고 있었다. 즉, 체계적인 전국적 ‘측우 네트워크’ 로 자연 현상을 측정하였으며, 비의 양을 농사에 참고했다는 점에서 우리 선조들의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면모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오는 형태에 따라 8가지 단계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즉, 미우(微雨, 아주 가느다란 비), 세우(細雨, 가느다란 비), 소우(小雨, 작은 비), 하우(下雨, 조용히 내리는 비), 쇄우(灑雨, 쏟아지는 비), 취우(驟雨, 많이 쏟아지는 비), 폭우(暴雨,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세세하게 분류를 하여 백성들도 강우의 정도에 대해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기상위성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대부분 농민들이 오랫동안 몸에 익혀온 느낌으로 농사일을 했다. 대충 이맘때쯤이면 비가 자주 오는구나, 아니면 제비가 낮게 날고 있거나 먹구름이 잔뜩 껴있으니 곧 비가 오겠구나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측우기의 발명 이후에는 이를 이용하여 매번 강수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측정기록이 쌓여 몇 년, 몇 십 년 이상의 자료가 되었고, 자연적으로 통계학적인 기록이 될 수 있었다. 매년, 혹은 매달의 평균치를 내어보고, 어떤 시기에 평균적으로 이만큼의 비가 내렸는데 올해는 평균보다 비가 덜 왔으므로 미리 논에 댈 수 있는 물을 확보하게 한다던가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분명 측우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과학기구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측우기의 가치는 단순히 장치의 발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우량을 측정하고 이 통계 처리하였던 점이다. 하지만 기기의 거동의 측면에서 측우기와 현대 과학 간의 큰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측우기는 단순히 사람이 우량을 측정하여 그 수치를 평균 내는데 그쳤으나 현대의 우량계와 통계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전산에 의한 반자동화로 그 기능이 작동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거동에서의 연관성을 찾기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고 그러한 발상을 처음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측우기가 경험을 ‘과학화’ 하는 과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측우기는 마치 ‘콜롬버스의 달걀’과 같다. 그릇에 빗물이 쌓인 양을 재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비를 그릇에 모아 재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종대의 학자들은 처음으로 우량을 측정해 자연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빗물을 모으는 그릇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를 때마다 측정하고 한 달 치, 일 년 치 등의 통계를 내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측우기를 만들고 이를 전국의 관청에 설치해 각지의 우량을 측정하고 이를 보고하도록 제도화했다. 말하자면 전국의 우량통계를 낼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현재 국립기상청의 우량기록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오늘날의 우량계는 측우기와 비교해 거동의 측면에서 크게 변화된 것이지 기능이나 구조면서는 큰 변화가 없다. 예를 들면 기상청 전시관에서 얼마 전까지 썼던 우량계를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모습이 너무나 단순하다. 동그란 통에 저울하나. 눈이나 비가 통에 쌓이면 이것을 자로 재거나 저울에 달아 높이로 환산해서 우량을 측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젯밤 서울지방에 30mm의 비가 내렸다”라는 관측보고는 어젯밤 내내 통 속에 쌓인 빗물의 깊이가 30mm였다는 뜻이다. 현대의 우량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강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강수란 수증기가 응결하여 구름에서 떨어지거나 공기 중으로부터 지면에 침전된 액체 또는 고체의 수증기 응결체이다. 강수량은 지면에 떨어진 강수의 양으로써 강수가 어떤 시간 내에 수평한 지표면 또는 지표의 수평투영면에 낙하하여 증발되거나 유출되지 않고 그 자리에 고인 물의 깊이를 말하며 눈, 싸락눈, 우박 등 강수가 얼음인 경우에는 이것을 녹인 물의 깊이를 말하며 이슬, 무빙, 서리, 안개를 포함한다. 비의 경우 강우량, 눈의 경우 강설량이라고 하며, 이것을 통칭하여 강수량이라고 한다. 강수량의 측정단위는 mm이고, 적설의 단위는 cm로 측정하며, 소수1위까지 측정한다. 일강수량은 0.2mm까지 관측해야 하고 가능하면 0.1mm까지 관측해야 하고, 주 또는 월강수량은 (최소한) 1mm까지 관측해야 하며, 일강수량의 측정은 정해진 시각에 행하여야 한다. 계산에 있어서는 강수량으로부터 강설의 깊이를 추정하는 경우에는 눈의 비중을 0.1로 하여 계산해 낸다. 예를 들면, 강수량이 10mm이면 이것을 10배로 하여 강설의 깊이를 대략 10cm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강수일수는 0.1mm이상의 강수가 있었던 날만을 일수로 취급하며, 이슬이나 서리만이 있는 날은 제외한다. 눈 일수는 눈, 소낙눈, 진눈깨비, 쌀알눈, 얼음침 중의 한 가지 이상의 현상이 있었던 일수로 싸락눈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량계의 수수기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WMO관측지침에 의한 면적은 200∼500㎠, 즉 반경이 8∼13cm로 되어 있으며, 현재 기상청에서 사용하는 직경 20cm의 수수기는 314㎠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과 원칙을 통해 우량계를 설계하고 설치하게 된다. 우량계를 설치할 경우는 지면을 파서 외벽의 부분을 흙으로 덮는다. 깊이는 외벽에 수수기를 끼웠을 때 수수구가 지면으로부터 20cm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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