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여왕들 선덕여왕 선덕여왕즉위배경 선덕여왕통치 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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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여왕들>>
Ⅰ. 서론
한국사 전체에서 여성이 왕이 되는 경우는 신라시대를 제외하고는 없다. 간혹 여성들이 왕보다 세력을 떨치는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왕의 권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중세에서 고대로 갈수록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근대 현대로 갈수록 여성들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다. 신라시대는 특히 여성들의 지위가 다른 시대들 보다 비교적 높았던 시대라고 평할수 있겠다. 그 단적인 예로 신라 여왕을 들 수 있겠다. 아무리 골품제에 따라서 여성이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비록 그렇더라도 성별이 신분제도보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을 다룬다. 이 여성들이 왕이 되는 배경와 즉위해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Ⅱ. 본론
1. 선덕여왕
(1)선덕여왕의 즉위 배경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사망한 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제27대 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여왕의 즉위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 왕위에 오른 사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선덕왕 즉위기사에는, 진평왕(眞平王)에게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세웠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성골(聖骨) 남자가 단절되었으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결국 선덕왕의 즉위는 진평왕(眞平王)에게 아들이 없는데다가,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 남자 또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에 진평왕에게는 왕의 사촌 동생이며, 둘째 사위인 김용춘(金龍春)이 생존해 있었고, 용춘의 아들인 김춘추(金春秋)도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의 가계(家系)를 왕실가계와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골 기준으로 생각하면 김춘추는 진골이 아니라 성골이 된다. 성골은 왕족과 왕족의 결합으로 나온 자식을 이야기하는데 김용춘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고 김용춘의 부인은 천명부인(天命夫人)으로 진평왕의 딸로 선덕여왕과 자매이다. 그러므로 김춘추도 성골이 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진골이다. 실제로 성골과 진골의 구분기준은 이 부분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덕여왕까지 상대(上代)로 구분하고 그 이전의 28왕 모두를 성골왕 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이 시기를 양분하여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를 중고(中古)로 구분하고, ‘이상은 중고(中古)니 성골의 왕이고, 이하는 하고(下古)니 진골이 왕이다.’ 라고 하여, 상고(上古)의 왕통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중고기(中古期) 왕을 성골로 표기함으로써 혈통에 대한 언급이 없는 상고기(上古期)도 함께 성골로 볼 수 있는 측면과, 상고기(上古期)에는 구분이 없었던 것이 중고기(中古期)에 와서 성골진골의 구분의식이 새로이 생성된 측면이다.
성골진골의 구분을 할 구체적인 분명한 자료는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왕대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성골신분은 당시 왕이 될 수 있는 자의 자격을 규정하는 기준이 있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신라에서 왕위를 이어가는 방법은 왕위 직계 왕자들이 그 대상이었지만, 때로는 사위도 거기에 포함 신라 4대 석탈해(昔脫解) ( 2대 남해왕의 사위 ). 13대 미추왕 ( 11대 조분왕의 사위 ). 48대 경문왕 ( 47대 헌안왕의 사위 ). 53대 신덕왕 ( 52대 효공왕의 사위 ).
되었기 때문에 신비성을 더 더해준다.
선덕여왕 즉위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면, 당시의 역대 국왕들이 왕권강화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치적으로 관부(官府)의 설치와 군제(軍制)의 개편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왕즉불(王卽佛)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민중과 직접적인 조우를 꾀한 것으로 왕은 보살이고, 백성은 일반 신도라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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