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즉위전후 사정 [즉위배경, 출생문제, 정적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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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즉위전후 사정
<목차>
머리말
1. 의자왕의 즉위배경
2. 의자왕의 출생문제
3. 즉위 초 정적의 숙청
맺음말
머리말
7세기 중엽,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백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 엄청난 사건이었다. 삼국 중 하나였던백제의 멸망은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도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흔히 의자왕을 그의 실정을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가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지며 그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였고, 이는 결국 백제의 멸망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의자왕을 떠올릴 때 주로 백제 멸망 직전, 즉 그의 재위 말년을 생각하며 그를 망국의 군주 등 부정적으로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는 즉위 초부터 백제의 부흥을 위해 왕권강화에 힘쓰며 당시 적국이었던 신라에 대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던 정복군주였다. 게다가 의자왕은 태자로 책봉될 당시 海東曾子라고 불릴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왕이었다. 그의 『三國史記』 즉위 초기 기록을 살펴보면 여색에 빠져 국정을 내팽겨 친 망국의 군주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우애가 깊은 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좋은 평가로 인해 元子인 의자왕의 즉위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과정이 매우 험난하였을 것이란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의견이다. 무왕대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그의 태자 책봉은 무왕말년에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늦은 태자 책봉에는 의자왕의 미약한 지지 세력과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강력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험난한 과정을 겪은 그는 즉위 후 전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바로 자신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숙청하였는데, 그에 관한 기록이 『日本書紀』에 남아있다.
본고에서는 의자왕의 험난했던 즉위 배경과 즉위의 어려움, 또 의자왕 즉위 초 숙청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0년에 걸친 의자왕의 정치활동을 전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三國史記』 百濟本紀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三國史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三國遺事』와 『日本書紀』도 보충하여 비교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의자왕의 즉위배경
의자왕은 백제 제30대 무왕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의 즉위에 대해 『三國史記』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A. 義慈王은 武王의 元子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므로 당시에 ‘海東曾子’라고 불렸다. 무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태종이 사부랑중 정문표를 보내 왕을 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三國史記』 권 28 의자왕 즉위조
위 자료를 살펴보면 의자왕은 왕족과 귀족들에게 두루 좋은 평판과 지지를 받고 안정적으로 즉위하여, 즉위 즉시 당 태종에 의해 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자료와 의자왕 아들의 묘지석인 ‘扶餘隆墓誌石’의 비교를 통해 의자왕이 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험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왕 재위 33년, 매우 늦은 나이에 태자에 책봉된다. 의자왕의 출생년도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扶餘隆墓誌石’을 통해 그는 대략 595년, 무왕 즉위 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태자에 책봉된 나이는 대략 30대 후반, 즉위 당시 나이는 40대로 볼 수 있다.
의자는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의 태자 책봉 시기는 무왕의 42년의 재위기간 중 비교적 말년에 해당한다. 무왕 말년이 되어서야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왕이 당시 후계자를 일찍 정할 수 없었던 정치적인 상황에 있었거나, 의자에게 여러 정적들이 많았기에 권력승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태자책봉은 곧 전제왕권의 확립을 뜻한다. 하지만 무왕은 왕권이 불안정한 미약한 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복군주로서 왕권을 굳건히 다진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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